신문웅 지역신문 기자가 세상을 사는 방법

여기 대책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이 있다.

14년째 지역에서 기자생활 한답시고 네 식구 먹고사는 문제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자신도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손해 봤으면서도 '정부 생계지원비 470만원' 마저 남에게 주어버린.

요즘같이 '경제만 살리면 되지'가 모든 사람들의 최고 바람이 되어버린 상황에 비춰보면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주목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는 시민기자다. 이름만 걸쳐놓은 시민기자가 아니라 이미 900여개의 기사를 쓴 오래된 베테랑 시민기자다.

그런데 나는 그를 잘 몰랐다. 적어도 태안기름유출 사고 발생 이후 하루에 몇 개씩의 주요기사를 올려 눈길을 끌기 전까지는. 그리고 기자이면서도 '정부생계지원비 양보'로 다른 매체에 취재대상이 되어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는.

신문웅(40).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정부 생계보조금 470만원을 왜 양보했냐고요?"

태안 기름유출 사고 당일,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해변으로 달려갔다.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밀려온 기름 사진을 찍으면서 넋이 나갔다. 살면서 가장 큰 절망감이 느껴졌다.

"어찌된 게 사고 이튿날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가장 먼저 와 있었어요. 다들 걱정 말라 하는데 8시간 걸리는 거제에서 새벽에 왔다는 건 전날 저녁에 출발했다는 거잖아요. 큰 사고인지 이미 알았다는 거지요."

‘태안신문’ 편집국장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그는, 그로부터 석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새벽이고 밤이고 없이 방제현장, 정부기관, 주민들의 시위 현장 등을 가리지 않고 누비고 다니고 있다. 최근 두 달 동안 쏟아낸 기사만 50건이 넘을 정도다.

"그동안 태안바다, 백리포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왜 몰랐을까, 소중한 줄 몰랐을까 싶어요."

사실 신문웅씨 본인도 이번 사고의 1등급 피해자다. 장인 소개로 친구 두 명과 함께 백리포 해수욕장에 있는 허름한 빈집을 구입해 작년에 빚내어 수리했는데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아예 열쇠를 우편함에 넣고 자원봉사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런 그가 470만원의 정부생계비는 왜 선뜻 양보했을까.

"정부생계비는 정부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더 큰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보상금은 소송을 걸어서라도 받을 거예요. 그건 사고를 낸 쪽에서 내야 하는 거니까요."

14년차 지역신문 기자의 월급봉투

그는 태안과 인연이 깊다.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만든 곳이 바로 태안이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던 대학 4학년(94년) 때, 어머니의 병간호 차 태안에 내려왔다가 눌러앉게 됐다. 때문에 그는 대학 졸업장도 없는 '미등록 제적' 상태다. 대학 졸업도 포기하고 태안에 눌러 앉게 만든 게 바로 지역신문이었다.

"주민들은 중앙지보다 지역을 다룬 기사에 더 관심이 많아요. 현장에서 지역주민을 만나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지역신문의 강점이죠."

그는 태안에서 싸움닭으로 불린다. 한번 물면 놓지 않아 붙여진 별명이란다. 작년 7월 태안앞바다에서 발견한 보물선 취재, '태안 대섬 앞바다, 고려청자 운반선 발견'은 특종으로 꼽히기도 했다. 반대로 지난 지방선거 때는 선거후보자 서면인터뷰를 보도하면서, 정당 후보마다 500자 답변의 답변양이 서로 달랐던 것을 그대로 실었다가 몇몇 정당 사람들로부터 거센 항의방문을 받기도 했다.

지역에서 지역신문으로 밥 벌어 먹는다는 건 웬만해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지역신문 14년차에, 편집국장인 그조차도 태안신문 월급으로는 아들 둘과 아내, 이렇게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해 생활의 상당부분을 아내에게 의존할 정도다. 도대체 수입이 얼마기에? "평균 한 200만 원 정도? 그래도 돈도 못 받아가면서 일했던 초창기 보다야 훨씬 좋아진 것"이라는 게 그의 답이다.

반면, 노동 강도는 노동법에서 보장하는 8시간 노동과는 거리가 멀다. 타블로이드 24면을 발행하는데 취재기자라고는 신문웅씨 본인을 포함해 3명뿐이다. 한 기자 당 10여 꼭지를 써야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일을 덜어내는 대신 한 가지를 더 늘렸다.

"생나무 되면 어떻냐고? 당연히 자존심 상하죠"

2001년 11월, 그는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었다. 첫 글을 올린 뒤 그는 틈 날때마다 ‘오마이뉴스’에 태안소식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기자들에게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라고 적극 권장한다.

"지역에선 ‘오마이뉴스’ 신문웅보다 ‘태안신문’ 신문웅을 더 잘 알지만, 도청이나 서울에서는 ‘오마이뉴스’ 신문웅을 더 잘 알죠. 지역 문제를 전국으로 이슈화 할 수도 있고, 바로 바로 마감하니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짬을 내어 올린 기사 중 생나무에 머문 것도 적지 않다. 어림잡아 100여건. 14년차 기자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생나무 되면 한동안 안 쓰기도 했어요. 지역의 중요한 사안이 그렇게 되면 정말 서운합니다. 근데 요즘엔 시간나면 생나무 기사를 다시 봐요. 보면서 아직 공부할 게 많이 남았구나 합니다. 지역에서만 기사를 쓰다보면 기사가 감정적으로 치우치거나 설명이 부족할 수 있는데 편집국에서 전화를 걸어와서 '요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지적해 주면 도움이 많이 돼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태안에 무슨 일이 터지면 이제 많은 라디오매체들이 '신문웅' 리포트를 조직할 정도로 그는 태안의 경쟁력 있는 소식통인 게 사실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 태안으로 와주세요"

몸은 고달프지만 그래도 마음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그다. 그러나 그동안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게 된 가족들은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집에서야 많이 이해해주죠. 정부 생계지원비 470만원을 양보하자고 했을 때도 아내가 선뜻 동의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물론, 가끔 초라한 밥상 앞에서 '그때 그거 받을 걸 그랬나봐'라고 농담을 하긴 해요(하하). 그런데 7살 5살 애들은 많이 서운해 해요. 아빠 보고 싶다고 엄마 시켜 전화걸기도 하지요. 그마나 주말에 취재 갈 때는 온 가족이 나들이 가듯이 같이 가기도 하는데 늘 미안하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아빠노릇 한다는 자부심도 가득하다. 누구는 정치입문의 징검다리로 지역신문 기자 노릇을 하고, 누구는 약자들을 등쳐먹을 속셈으로 '사'자 붙은 기자노릇을 한다지만, 적어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기억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신문웅 기자는 지역민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요즘은 삼성과 특별법에 집중하고 있다. 문제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지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태안의 주요사안을 이슈화하는데 ‘오마이뉴스’가 굳건한 동반자가 되리라고 믿고 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태안에 와 보십시오. 어떻게 변했나도 보고...꼭 자원봉사가 아니라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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