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학교역 급수탑

왠지 모르게 낯설어지는 고향집 근처, 어쩌다 고향마을을 방문해도 알아봐주는 이 거의 없어 어릴적 거닐었던 좁은 곡목길을 혼자 멍하니 걷다가 쓸쓸히 돌아왔던 기억, 고향인데 마치 관광객처럼 느껴지는 허무한 마음, 기억은 그대로인데.

어렸을적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기억은 많은데 지금 그 추억의 장소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고향지척에 가족들이나 친인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 고향집을 가끔 찾고 있지만, 어렸을적에 생활하던 집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빈집으로 남아있거나 폐허가 되었거나 아예 사라져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추억은 삭막해지는 외로운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과거 좋은 기억만 있는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 라고 추억에 잠겨서 팍팍함을 잠시 잊어보는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은 현실보다는 추억의 시간들을 더 좋게 기억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기억하고 싶은 좋은 것들만 편집해서 남겨두었다가 조금씩 꺼내어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싶을 때 그렇게 즐기는 것도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은 함평의 옛 모습, 그 기억의 언저리에 남아있을 어릴적 추억을 찾아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함평을 기대해 보면서 함평지역 곳곳의 이야기들을 찾아 나선다.

봄 기운을 느낄 찰라 어느새 여름인가. 꽃구경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하는 4월의 오후다. 화창한 봄날, 학교면 학교리 일대를 다녀왔다.

함평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태종 9년에 함풍현과 모평현을 통합하면서 함평에서 함자를, 모평에서 평자를 따 함평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속되었지만 무안군의 해제면, 현경면,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본양동, 임곡동 일부, 장성군 동화면 일부, 영광군 묘량면 일부까지 함평군역이이었다고 한다.

학교면은 1914년까지 지금의 무안군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금동, 진례, 좌촌면을 통합하여 학교면을 신설하여 함평군으로 편입되었다. 금동면은 지금의 고막, 복천, 마산, 월송, 백호, 금곡, 상옥리였으며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의해 월송, 백호, 금곡, 상옥의 4개리가 대동면으로 편입되었다.

진례면은 지금의 곡창, 월호, 금송, 석정리가 관할구역이였고, 좌촌면은 학교, 월산, 사거, 죽정리가 관할구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래 11개의 법정리로 운영되다가 1985년도에 11개 법정리에 30개의 운영리로, 1987년도에 11개 법정리에 34개 운영리로 운영되었고, 현재는 11개의 법정리에 35개의 행정리, 61개의 마을로 운영되고 있다.

학교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는 목포부에 속했던 곳이다. 1914년 리제(理制)를 시행하면서 좌촌면(左村面)의 이암(耳岩) 전역과 쌍교(雙橋), 회춘동(回春洞)의 각 일부와 진례면 영화촌(進禮面 永化村)을 합쳐 학교리(鶴橋理)를 편성하였다. 리명(理名)은 소학교(小鶴橋), 대학교(大鶴橋)를 합쳐 쌍교(雙橋)마을이라 붙인데 근하여 “학교리(鶴橋理)”라 했다.

1915년 10월 4일 금동(金洞), 좌촌(左寸), 진례(進禮)의 3개면을 통합한 학교면사무소를 건립하였는데 1985년 8월 13일에 현대식 2층 건물로 재 단장하게 되었다.

1913년에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학교역이 세워졌는데 로선직선화 및 고속전철화 사업에 의해 학교역이 학교면 사거리로 옮기면서 학교역을 함평역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30년에는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고, 1950년에는 학다리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인재양성에 이바지하다가 학교면내 3개 초등학교로 통폐합되어 그 자리에 새로운 학다리중앙초등학교를 신축하여 2009년말 영창초등학교까지 통폐합하여 학교면의 유일한 단일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좌로부터 청암 김종환선생기공비/새마을사업공덕불망비/죽당박재수공로비/송암김용규송공비

☞학교리 학다리, 신학, 백학

1562년 흥덕장씨인 의(懿)라는 사람이 이주 정착하였으며 1800년대에는 신안주씨 계춘이란 사람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이후 여러 성씨가 모여 살면서 인구수가 많아지고 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운영리가 분할되어 현재 학교1리 학다리, 학교4리 신학, 학교6리 백학으로 되어 많은 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의 형국이 학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에 마을 앞까지 호수처럼 물이 찼을 때 학이 많이 날아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장수하는 학을 으뜸으로 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정확한 유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1789년 호구총수지명에는 호양촌(湖陽村)으로 되어있으며 지역이 넓어진 지금은 학교1리(鶴橋1里) 학다리, 학교4리(鶴橋4里) 신학, 학교6리(鶴橋6里) 백학으로 정하여 각각 마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학교리 이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하나 어느 성씨가 최초로 입향하여 살았는지는 모르며 300여 년 전에 진주정씨가 입향한 후 김해김씨와 광산김씨, 기타 성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뒤 산등에 귀모양의 바위가 있고 또 마을 모퉁이에 귀걸이를 방불케 하는 돌이 점점이 놓여 있어 옛날 함평에서 나주 동강을 가던 길손들이 "귀바위 모퉁이를 돌아 얼마 안가면 망월동 나루가 나온다"라고 귀바위, 귀바위하고 불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귀바위" 즉 이암(耳岩)을 마을 이름으로 하였다 한다.

☞학교리 영화촌

마을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김해허씨(金海許氏) 기회가 입향하였으며 그 후손은 허대평이다. 이어 창녕창씨, 김해김씨인 상구(祥九)와 상칠(祥七) 두 형제가 입향해서 촌락을 형성하였다. 그 후 처가인 능주구씨와 함께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많은 성씨가 모여 살아가고 있다. 원래는 영촌(永村)이라 하였으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명을 "영화촌(永化村)"으로 바꾸어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은곡광산김공용안선덕불망비 :회춘동 마을앞에 세움

☞학교리 쌍교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광산김씨가 입향한 후 한양조씨, 진주정씨가 입향하였으며 지금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뒤에 입향하였는지 알 수 없는 많은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지명도에도 쌍교( 橋)로 표기되고 있는 이 마을은 마을 양 옆으로 하천이 있어 소학교(小鶴橋), 대학교(大鶴橋)로 불리는 두 다리(橋)가 두개여서 "쌍교"라 하였다는 것과 학(鶴)의 다리가 두개여서 마을 이름을 "쌍교( 橋)"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다리(橋)가 두개여서 마을이름을 쌍교( 橋)라 하였다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학교리 회춘동

광산김씨 회춘당 김대연(回春堂 金大衍, 1690~1783)이 1720년경 무안읍 고철에서 이거 정착했으며 90년 전 평산신씨와 이천서씨, 순흥안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옛날에는 귀래촌(歸來村)이었으며 지금도 이 이름의 음이 변형되어 "구재촌"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귀래촌의 내력은 알 수 없고 동구 밖 좌측, 지금의 당산나무 자리에 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1837년 강한 폭풍우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고목의 뿌리에서 새순이 다시 돋아나와 지금의 당산나무가 상서롭게 자라므로 새롭게 봄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회춘동(回 春洞)이라고 불리어오고 있다고 하며 또 개촌자 김대연의 호인 회춘당을 따 회춘동이라고 한다고도 한다.

현재 회춘동 마을의 고인돌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 학다리 유래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라는 곳에 옛적부터 ⌜학다리⌟라 불리는 들판과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배를 매여 놓았던 닻배기 (지금의 달배기)와 조세를 받았다는 동창(東倉)이라는 동명(洞名)과 동창 뒤에 있는 창테산이라는 산명 (山名)과 어선이 떠날 때 고기의 풍획 (豐擭) 을 빌기 위하여 제당에서 제사를 지냈던 당코배기라는 지명(地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들판이 바다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이 들판에는 조수의 간만으로 인하여 물이 빠지면 많은 개울에 널려 있는 조개류를 주워 먹기 위하여 많은 학(鶴)들이 모여 들었고, 물이 들면 망망대해가 되어 어선의 왕래가 빈번하였다고 한다.

 

아주 먼 옛날 이곳에 여씨노인(呂氏老人)과 효심이 지극했던 딸 효순이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아버지를 찾아 나선 효순이의 구출을 위해 수 백쌍의 학 떼가 날아와서 혹은 날개로 혹은 두 발로 효순이를 구했다하여 “학다리”라고 하고, 두 줄로 늘어섰다고 하여 “쌍다리”라고도 한다.(출처: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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