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신군부 권정달씨가 민정당 입당 강요”

“통일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1980년 10월 신군부의 실세 권정달씨가 찾아와 직장 그만 두고 집으로 가든지 (민정)당으로 가든지 알아서 선택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당으로 갔어요.

그런데 또 광주로 출마하라더군요.

하지만 그것은 거부했어요.

그래서 전국구 의원 자리를 준 것이에요.”
이영일(68) 전 국회의원이 비례대표로 11대 국회에 진출하던 1981년 이야기다.

3선 의원을 지낸 이 전 의원은 1939년 함평군 함평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그러다 해보초등(국민)학교 2학년 때 광주중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해보면장이던 부친이 광주시청으로 근무지를 옮긴 것이다.

그후 광주에서도 이사를 하면서 5∼6학년은 서석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당시 광주 최고의 명문이던 서중과 일고를 나와 1958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 전 의원은 3학년 때인 1960년 4·19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부정선거에 대해 대학생들이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서울대 문리대 학생 데모를 주동했어요.

당시 같이했던 친구들이 윤식(전 국회의원), 이수정(전 문광부장관, 작고), 박실(전 국회의원), 양성철(전 국회의원) 등이었지요.” 이 전 의원은 4학년 때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다가 5·16이 일어나면서 투옥됐다.

“ 5·16 혁명재판에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함 특별법에 의해 7년형을 선고받았어요.

당시 주심판사가 이회창씨였습니다.” 이 전 의원은 투옥 1년여 만에 형을 면제받고 출소했으며 1963년 복학했다.

이 같은 전력 때문에 졸업 후에 취직을 못하고 있었던 그는 1965년 소위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으로 두번째 구속됐다.

“당시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격화되면서 고려대에 무장군인이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묘하게도 당시 출병한 군인 중에 전두환이 있었어요.

그래서 ‘학원방위군’이라는 학생 조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조직원들 모두가 한독당에 가입했어요.

효율적인 운동을 하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총선에 공천도 했어요.

김두한씨가 당시 선거에서 이겨 국회에 진출했고요.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 모두 체포됐어요.

또 7년 구형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무죄로 풀려났지요.”
석방 후 그는 바로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연구원에 조교로 취업했다.

거기에서 2년간 사상계에 정치 평론도 썼다.

1968년엔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전과자는 신원조회에서 걸려 모든 공직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동양통신 사주인 김성곤씨가 도와줘서 간신히 취업했지요.

그런데 외신부에서 일하다 보니 해외 소식을 많이 알게 됐고 당시 김대중 의원이 저에게 그런 해외 상황을 자주 물었어요.

그런 내용이 도청으로 밝혀지면서 회사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4·19혁명 주동자가 김대중 계보로 갈 수 있다고 우려해서인지 저를 통일원에 취업시켜줬어요.”
그는 통일원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시작해 북한정치 연구관, 교육홍보국장, 교육홍보실장을 거쳐 역대 최연소로 차관보급인 통일원 연수원장을 지내는 등 10년간 근무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평화통일 방안인 ‘평화통일 대계’를 만들어 통일원 장관에게 보고했으며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정위원회 회의 개최 등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0·26이 일어났지요.”
신군부의 강권에 못 이겨 국회의원이 된 이 전 의원은 전국구 의원직을 마치면 통일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권정달씨가 통일원으로 다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믿었지요.

그런데 1985년 12대 총선 때 광주 서구로 출마하라더군요.

현역 의원인 박윤종씨의 나이가 많다고 교체한 것이에요”
그는 중선거구제 하에 치러진 총선에서 김녹영씨(신민당)에 이어 차점자로 재선의원이 됐다.

“당시 선거에는 유세전이 재미있었어요.

당시 제가 했던 연설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언론에 대서특필됐는데 그 중에 ‘광주시민은 언제까지 해태 타이거스가 이기는 재미로 살 것인가.

이제는 해태가 지더라도 돈을 벌 수 있는 광주시가 돼야 한다’ ‘광주에는 낙후성이라는 눈에 보이는 문제가 있고 한과 응어리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은 문제는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내용은 지금도 기억합니다.”
이 전 의원은 또 이 12대 총선에서 광주의 직할시 승격을 공약했다.

“당시 김동환 시장이 적극적으로 부추겼어요.

당시 직할시로 승격하려면 인구 100만명이 넘어야 하는데 당시 광주 인구는 부족했어요.

그래도 선 승격, 후 보완하겠다며 밀어붙였어요.

당선 후 광산구를 광주로 편입시키면서 직할시 승격을 통과시켰어요.”
그는 의정활동 중에 광주에 대한 돋보이는 애정과 노력을 보였다.

“광주의 일이라면 몸을 돌보지 않고 해결하고자 노력했기에 당시 억울하고 꼭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서울에 가서 이영일과 상의해 보라’고 말이 돌 정도였어요.

5·18 해직교수의 복직 문제를 제기, 뒷날 해결의 실마리가 됐고 평동공단 등 산업시설 유치 등 각종 도로 개설 및 숙원사업 해결을 위한 정부의 조치를 이끌어 냈습니다.”

94년 ‘北에 따뜻한 햇볕 필요’ 주장 … DJ와 인연

이영일(68) 전 국회의원은 광주직할시 승격과 비엔날레 개최 등 참신한 공약과 지역발전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 13대와 14대 총선에서 거푸 고배를 마셨다.

평민당 바람 즉 ‘황색 돌풍’ 때문에 광주 서구에서 정상용 전 의원에게 무너진 것이다.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민정당, 1992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후보는 광주·전남에서 단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운이 나빴다고 본 것이죠”
이 전 의원은 정치휴면기인 1989년부터 1990년까지 2년간 일본 츠쿠바(筑波)대학 역사인류학계에서 국제정치, 특히 공산권의 체제변동을 연구하면서 일본 열도를 주유천하(周遊天下) 했다.

또 1989년에는 단신으로 국교도 없는 중국을 방문, 천안문 사건 이후의 중국사회상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 전 의원은 1992년 총선 이후 벌어진 14대 대선 당내 경선에서 이종찬 후보 편에 섰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정국을 ‘호남 대 비호남‘ 구도로 만들어 버린 김영삼씨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요.
그래서 반YS의 선봉에 섰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 후보가 정책 연설을 거부하는 등 경선이 기형으로 치닫자 이종찬 후보가 불만을 품고 경선 이틀 전 포기하고 탈당하면서 민자당 경선은 불발됐다.

이 전 의원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를 하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94년 북핵문제가 대두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제가 한 언론에 ‘북한을 겁주지 말고 따뜻한 햇볕으로 녹여야 한다’고 주장한 글을 실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관심을 가진 모양이요.

그 뒤로 통일문제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가까워졌죠.

그리고 이종찬씨와 함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위해 신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15대 국회에는 입성했다.

1997년 8월 당시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신기하 의원이 항공기 추락 사건으로 사망, 광주 동구 보궐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박태영 전 지사와 저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제가 압도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나와 공천을 받았습니다.

15대 대통령 선거와 함께 실시된 이 보궐선거에서 저는 상대 후보가 중도 사퇴, 무투표 당선돼 10년여 만에 의사당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전 의원은 1999년 6월엔 집권당의 대변인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직접 지명에 의해 새정치국민회의의 대변인으로 발탁됐습니다.

침체한 국정분위기를 일신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2000년 16대 총선 공천에서 또다시 탈락했다.

대신 김경천 당시 광주 YWCA사무총장이 공천을 받았다.

“3선의 중진이자 집권당의 대변인이 공천에서 탈락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공천권을 쥐고 있던 동교동 구파들이 광주시민단체들과 제휴, 저를 5공 세력으로 몰아 광주지역 낙선대상자로 낙인찍은 것입니다.

공천심사위원들도 모르는 공천탈락이었습니다.

호남지역의 국회의원 후보는 심사대상으로 올리지 않고 동교동계에서 일방적으로 공천했기 때문이죠.

당시 김경천씨가 공천을 받은 데 대해 정가에서는 이희호 여사가 YWCA 출신이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리와 고 조아라 여사가 강력 추천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저를 배제하기 위해 명분을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동교동계라는 같은 식구가 아니어서 배제된 것뿐입니다”
그는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그러나 이 전 의원은 좌절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응했다.

“정치에서 은퇴하고 그동안의 생활을 돌아봤습니다.

남의 섬김을 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긴장과 경쟁 속에 살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나머지 삶을 섬김과 봉사의 길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이 전 의원은 우선 평소 막후에서 지원하던 한민족복지재단의 북한어린이 돕기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의료지원을 넘어서 북한어린이들에 대한 무료급식사업을 실시했다.

“평양 동성동에 빵 공장을 건립하고 매일 평야 근처 탁아소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150g 상당의 소보루 빵을 나누어주는 사업(사랑의 만나운동)을 펼쳤습니다”
이 전 의원은 2002년 3월에는 한민족복지재단 사업을 국외로 확대시켜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에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다.

아프간 어린이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지리 샤리프 지역에서 수많은 어린이에 대한 의료지원활동을 벌였다.

2003년 7월에는 두 번째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 수로비지역에 관개사업을 지원했다.

그는 후학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호남대, 한라대, 한성대 등에서 민주주의론·북한학·동아시아 국제관계론·한국정치론 등에 대해 강의했다.

이 전 의원은 또 요즘 매주 화요일은 전주 우석대 테크노대학원 초빙교수로 국제관계론 과목을 강의한다.

또 금요일에는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민족복지재단 사무실에 나간다.

그 외에는 거의 매일 여의도에 있는 한중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보낸다.

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집이 있는 반포의 헬스클럽에서 매일 수영과 스트레칭을 한다.

▲1939년 함평군 함평읍 출생
▲광주서중·일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1, 12, 15대 국회의원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중앙정치연수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특보, 대변인
▲한중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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