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서양화의 거두, 백열 김영태 화백 초대전

4.29-7.10일까지 함평군립미술관 제1전시실에

국내외 풍경을 담은 인상주의 그림 44점 전시

 

함평군립미술관에서는 제18회 함평나비대축제 기념 특별기획으로 백열 김영태 화백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고향에서 9년 만에 맞이하는 김 화백의 이번 초대전은 처음으로 선보이는 15점을 포함해 국내외 자연과 인물 풍경을 인상주의 화풍에 담은 그림 44점이 전시된다.

국내보다 일본과 유럽 등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알리게 된 김 화백은 담대한 필치로 빛을 조각하듯 독특한 인상주의 화풍으로 서정적인 풍경들을 그려내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한 장소에 있어서도 계절에 따른 미묘한 변화들을 포착해 자연의 본질을 드러냈다.

김영태 화백은 국내와 해외의 수많은 나라들을 100회 이상 돌아다니며 현장 사생으로 자연을 화폭에 담아내는 데 때로는 한국적이고 때로는 이국적인 신비가 감도는 풍경과 조형들은 감상자에게 여러 겹의 중층적인 감흥을 안겨준다.

올해로 구순(九旬)을 맞이한 원로화가 김영태 화백은 1927년 함평읍 진양리 하느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문학에 두각을 나타낸 김 화백은 언제나 자신만만한 수재 소년이었다.

 

‘그림도 어느 정도 선천적 능력을 타고나야 하는 것 같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김 화백은 초등 5~6학년 미술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 그림에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름을 쓰지 않아도 다들 그의 그림인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마음에 든 자만심일 수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릴 때 그의 내면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자존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이후 광주공립농업학교에 수석입학해서 당시 함평사회에서 떠들썩했고 기쁜 마음에 김 화백의 아버지는 150원(현재가치 1억5천여만원)을 학교에 기부하게 된다.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었던 전시 때라서 고등학교를 몇 개월 앞당겨 졸업했는데, 그때 미술과 문학에 모두 심취해 있던 김 화백은 동경대학 인문학부나 미술학부 같은 곳에 유학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815해방을 맞게 되어 일본유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기대하고 올라갔지만 해방직후 서울에 미술연구소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다시 광주로 내려온 김 화백은 우연히 호남신문에서 조선대학교 설립 소식을 듣게 되고 신설되는 미술과에 응시하게 된다. 김 화백은 논문과 구술시험을 통해 수석합격하고 졸업 때까지 전액 장학금으로 학교를 마치게 된다.

전문부 3학년을 수석 졸업한 김 화백은 학부로 다시 편입해 다시 2년을 더 다니는데, 전문부 2학년 때부터 중·고등학교 교단에 서 미술선생을 겸하게 되면서 당시 제자들은 그가 대학생인줄 모르고 다들 그냥 미술교사인줄만 알기도 했다.

김 화백은 대학시절 지도교수 김보현 선생으로부터 유화의 모든 것을 배웠다. 김보현 화백은 24시간 붙어 다니며 제자 김영태 화백을 지도했고 6.25 전쟁 때도 생사고락을 함께 할 만큼 운명적인 사제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심신이 지친 김보현 화백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이후 김 화백은 남도 서양화의 대가였던 오지호 화백으로부터 인상주의 화풍을 사사하게 되고 그의 화풍도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넘어가게 된다.

한편 1949년부터 1963년까지 김 화백은 광주 시내 여러 중·고등학교의 교단에 서게 되고 조선대 조교수까지 하게 되지만 월급이 박봉이라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정작 김 화백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교직에 전념하게 되면 그림에서 멀어지게 될까봐 고민하다가 어느 날 무작정 학교에 사표를 내 버린다.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그를 뜯어말렸고 학교 측에서도 김 화백을 설득하기 위해 그를 찾으러 다녔으나 김 화백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기 위해 일주일 이상 도망 다녀야 했고 결국 학교 측에서도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쥐꼬리만한 월급이나마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집안형편은 더욱 곤궁해졌고 김 화백은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한 달간 그림을 그리지 않고 버티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광주농업고등학교의 일본인 동창생이 30여년만에 일본에서 찾아왔고 김 화백은 친구에게 그림을 선물하는데, 시청계장으로 근무하던 그 일본인 친구가 그림을 일본에 가져가 자랑하며 유명한 대가인 우찌노 히데미 씨에게 보여주게 된다.

우찌노 히데미 씨는 작품에 감명을 받고 직접 광주에 있는 김 화백의 화실을 방문해서 10여일을 머물며 김 화백에게 일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할 것을 권하게 된다. 김 화백은 여러 번 고사했지만 하도 간곡하게 부탁해 와서 전람회에 작품 하나를 출품하게 되는데 그것이 장려상을 받게 되면서 일본 미술계에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때가 1967년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일본으로부터 정식으로 개인전 초대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면서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찌 등 일본 메이저 언론을 비롯, 지방 신문에까지 대서특필되었고 그의 이름은 점차 프랑스, 독일, 러시아, 불가리아 등 유럽에까지도 알려지게 되고 미국 등지에서도 초대작품 전시가 이루어지게 된다.

김영태 화백은 1967년에 광주일요화가회를 창립해 77년까지 회장 겸 지도교수를 맡았고 이후 1972년부터 광주·전주·목포·여수·서울·제주·일본·대만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아세아미술제(동경 등, 79~84), 롯데화랑초대전(86), 영호남원로미술인초대전(89), 동아일보70주년기념 백두산실경사생전(91), 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92), 불가리아미술동맹초대전(95), 한불국제회화서울전(97), 독일프랑크푸르트초대전(97, 01), 중국청도시립미술관초대전(01), 일본 히로시마 평화미술전(04), 한국전업미술작가회전(05), 광주-가고시마 교류전(06) 등의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며 현역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왔다.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했고, 광주미협 회장과 대한민국미술미술대전, 전남도전, 광주시전, 무등미술대전 등의 심사를 맡기도 했다.

20세기를 통해 여러 모더니즘 화풍들이 유행처럼 시대를 풍미했지만 김 화백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자세로 자연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선회하면서 김 화백은 화가의 개성과 조형의 자유로움, 그리고 색채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의 본질을 들여다보며 ‘회화의 모든 양식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을 인상파화풍 예술에서 찾았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김 화백은 또 다른 경지로 나간다. “창작행위로 이루어지는 예술양식을 굳이 어떤 이즘이나 화풍이라고 하는 카테고리에 넣어, 꿰어 맞추는 것이 꼭 바람직한 것인가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물 흐르듯, 흩어지는 바람을 더듬는 현자의 손길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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