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인 소더비 경매나 크리스티 경매 뉴스가 들려오면 무엇보다도 그 높은 낙찰가에 놀라움을 표하게 된다. 천억원대를 호가하는 피카소, 반 고흐, 클림트 같은 근현대 유럽 화가들과 잭슨 폴록, 데 쿠닝 같은 미국 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좋은 작품들이긴 하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가격이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덜 알려진 루시안 프로이드, 마르크 샤갈, 모딜리아니, 로이 리히텐스테인, 마크 로스코 등 현대 화가들의 작품들도 경매에서 수백억원에 거래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의아하기도 하다.

앞서 예시한 수백억원대의 화가들은 모두 유대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낙찰가격을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자기문화에 대한 존경, 자국민 출신의 예술가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 같은 게 크게 작용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오늘날 전 세계 미술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유대인, 중국인, 러시아인 화상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현대화가들 중 가장 가격이 비싸다는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등의 작품들의 경매가가 십억원이 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우리 화가들의 작품 수준이 외국 화가들보다 그 가격만큼이나 질적으로 떨어져서 그렇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술품에 가격을 매긴다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술품 구입이 그저 하나의 투자로서만 의미를 지닐 수도 있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품을 구매한다는 행위가 하나의 고매한 행위로 비치는 것은 그 행위가 지닌 인간과 문화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예술품을 구입하는 행위는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식이다. 천만원을 주고 구입하면 천만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고 천억원을 주고 구입하면 천억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은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문화자본’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문외한에게는 피카소 그림이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피카소 작품은 아무리 뜯어봐도 물감과 기타 재료비를 다 합쳐도 십만원도 안 될 터이니 경매시장에서의 천억원 대의 거래는 천인공노한 일일 터이고 그저 미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예술품을 대하는 두 태도 중 어떤 게 옳은지 따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예술품 거래가격이 객관적 지표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에 대한 존중이고 경의를 표현하는 행위라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악명 높은 이슬람국가(IS)가 중동지역의 여러 국가들을 침입해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그 지역의 문화유산과 예술품부터 파괴하는 것은 문화와 예술품이 갖는 인본주의적 힘과 상징, 그 가치를 잘 알고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리라.

함평도 요즘 추사 김정희의 서예작품 확보와 관련해 집행부와 군의회의 대립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지난해 추사작품 확보를 위한 사례비 조례개정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함평군의회의 한 의원이 종이쪼가리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말해서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여기서 추사 작품의 역사적 가치를 따로 논하진 않겠다.

지금 함평군의회는 추사작품 69점을 35억원에 전부매매하는 계약으로 변경하라고 주장한다. 작품 소유자의 뜻을 무시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기증과 구입을 병행할 경우 똑같은 35억원을 들여서 200억원 이상의 자산가치가 발생하는데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그저 우리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자는 주장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한 지역신문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에 서예 같은 고리타분한 예술품을 누가 감상하겠느냐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처음에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문화와 예술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종이쪼가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고 우리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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