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흐른다. 우렁우렁 강물이 흘러도 다리에 서면 길이 보이고, 다리가 끝나는 곳에 가면 길이 나온다. 가야할 길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다. 내 가족이 있다. 오늘 하루의 저녁이 있다. 어린 때 징검돌을 징검징검 오가던 징검다리가 있었지. 큰물이 나면 바로 앞 학교에 가지 못해 발 동동 가슴 동동대던 여울목이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곳까지도 차로 오갈 수 있는 다리가 놓였다. 이것만이 아니라 바다에 다리를 놓아 육지와 섬의 길, 섬과 섬의 길을 이어주는 시절인데, 아주 오래 된 다리를 거니는 내 마음은 왜 편안하지 않은가.

1894년 11월, 나주성을 점령하고자 진격하던 동학군과 나주성을 지키고자 하는 수성군이 이 다리를 두고 대치한 결과 이 일대를 피로 씻어냈다고 하는데, 그 때의 비린내가 이 돌다리에 스며들어 스멀스멀 나와서 일까. 아니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금성정의록>에서 말하는 최후의 결전 때문일까. 퇴각하던 동학군이 그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서 이 다리의 일부 상판을 들어내야만 했던 심정을 헤아림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다리는 수없이 만들어 졌지만, 자꾸만 무너져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리에 대한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고 나면 접하게 되는 것이 길이다. 갈래갈래 길을 걷는 것이 하루의 일과를 하는 것이다. 길은 중첩되어 있다. 보이는 길이 있고 보이지 않은 길이 있다. 다리도 그렇다. 보이는 다리가 있고 보이지 않는 다리가 있다. 보이는 다리는 눈으로 확인되는 물질적 다리며, 보이지 않는 다리는 세상 삶속에 존재하는 다리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다리에 접하며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다리는 물질적인 다리보다 인간관계의 다리다. 그 많던 인간적 다리들. 나눔의 다리, 배려의 다리, 우정의 다리, 믿음의 다리, 인정의 다리……. 시나브로, 시나브로 무너지고 있다.

지금 제가 걷고 있는 아주 오래된 이 다리의 이름은 고막천 석교입니다. 어린시절 이 근동 어른들이 집에서는 횃대에 걸어두고, 마을에서는 당산나무에 걸어두고 우리에게 쓰시던 말씀. "너는 떡다리 밑에서 주서왔다"는 그 다리. 오랜 세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니 별칭들도 생겼습니다. 돌로 된 다리이기에 ‘독다리’, 독다리가 경음화 되다보니 ‘똑다리’, 인근 마을에서 이 다리를 건너 나주나 영산포 등지에 떡을 팔러 다녔다해서 ‘떡다리’, 고막대사가 만들었다 하여 ‘고막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별칭으로 불러지지만 확인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전설로는 고려 원종 말기인 1270년대 초에 무안 법천사의 고막대사가 도술로 이 다리를 놓았다고 합니다. 전설은 민담과 달리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증거물이 있습니다. 특정의 개별적 증거물이 없어진 전설은 전승이 중지되거나 민담으로 전환한다고 합니다.

광주민속박물관의 기획전시 <길에서 남도를 만나다>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승려나 불자들이 다리 축조에 참여한 사례가 더러 있는데, <세종실록>에는 다리축조 공로로 대선사 임명장을 받은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성현의 <용재총화>, 서해문집에서 나온 번역본을 보니 어떤 승려가 다리를 세웠는데, 300여 걸음에 달하는 길이의 다리를 만 개의 돌을 채취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초기의 이런 자료들과, 기록은 없지만 불교가 고려시대의 공인종교였던 것을 감안해서 감히 생각해 봅니다. 고막대사가 관주도의 고막천 석교 축조를 감독했거나, 고막대사 주관으로 불자들과 보시행의 일환으로 ‘다리불사’를 했다고 혼자만의 시나리오도 구상해 봅니다.

다리는 이편에서 건너 갈 수도 있고, 저편에서 건너 올 수도 있는 쌍방향입니다. 다리는 길의 연장입니다. 다리는 길과 길을 연결하는 이음새입니다. 하지만 길은 수많은 다리를 모아 놓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물 1372호 고막천 석교, 7백년을 첫마음 첫자리 그대로인 이런 믿음과 소통의 다리를 놓았으면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다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생의 고비고비를 건너게 하는 짱짱한 돌다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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