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9.11.14 목 16:53
> 기획연재 > 마을답사
무지랭이 농민들의 피맺힌 외침, 갑오농민전쟁
신영호의 문화산책  |  webmaster@nctimes.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7.08.25  09:47:08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무지랭이 농민들의 피맺힌 외침, 갑오농민전쟁

관리들의 탐학과 봉건 정부의 부패 및 외세의 침탈에 맞선 19세기 후반의 농민운동은 동학혁명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불리운다. 갑오년(1894)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이천만명이 안 되던 시절, 동학에 삼백여만명이 참여했고, 그 가운데 수십만명이 농민군으로 활동했던 조선 최대의 농민전쟁.

곡창지대였던 삼남 지방은 탐관오리들의 탐학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함평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삼남지방에서 갑오농민전쟁의 불길이 가장 먼저 솟아올랐고 그들의 외침은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함평 또한 어느 지역보다 앞장서 극렬한 항쟁을 전개한다.

농민들의 저항은 동학의 포교 이전에도 각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었다. 이는 무능한 정부와 관리들의 가렴주구, 또한 이리떼로 비유되던 향리들의 끊임없는 수탈이 농민들을 더욱 피폐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결과였다.

여기에 19세기이후 진행되던 봉건적 사회질서의 해체과정과 함께 성장한 농민의식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국지적 농민항쟁이었던 1800년 인동농민항쟁, 1808년 북청과 서천농민항쟁, 1811년 해주농민항쟁과 평안도 농민전쟁 등의 농민항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1862년 전국적으로 발생한 농민항쟁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이렇듯 갑오농민전쟁 이전에 이미 농민들은 국지적이지만 지속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와 연해 있고 미곡의 생산이 풍부했던 함평 역시 수탈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수탈에 묵묵히 참고 있던 함평의 농민들이 먼저 일어났던 때가 1862년이었다. 병란이라고 지칭되며 한달여 함평을 농민들의 자치 지역으로 만들었던 이 항쟁은 함평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미 1862년 농민항쟁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함평

   
 
   
정한순을 우두머리로 1862년 4월 16일 일어났던 농민항쟁은 분명 1862년의 전국적인 농민항쟁의 일부분이었다. 또한 같은 해 2월에 일어난 진주농민항쟁보다는 늦게 발생됐다. 하지만 전국 70여개 군현에서 일어난 여느 농민항쟁보다 극렬했으며 동헌을 접수한 후 한달여를 자체 통치한다.

당시 항쟁을 이끌었던 지도부를 살펴보면 정한순, 이방헌, 김백환, 진경심, 홍일모, 김기용 등 6명으로 이들은 항쟁초기부터 항쟁이 마무리 될 때까지 진두지휘한다.

농민군들이 초기부터 무력 투쟁을 시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먼저 관청에 연명으로 소(疏)를 올리는 등소운동을 전개한다. 곧 합법적인 투쟁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당시 함평현의 모든 면이었던 14개면에서 자체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장날이던 4월 16일을 기해 전면 봉기를 하게 된다. 봉기 후 농민군들은 고리대나 고율의 소작료로 원성이 높았던 토호나 지주·부민들의 집을 불 지르고 현감을 추방했으며 또한 교원을 장악한다.

읍권(邑權)을 장악한 농민군은 교원에 머물면서 자체 통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5월 10일 정부에서 안핵사가 내려오자 6명의 주동자들은 안핵사의 앞에 나가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렇듯 한달여 동안 읍권을 장악하고 직접 현을 통치한 예는 보기 드문 예이다. 이들의 항쟁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는 항쟁의 다음 해인 1863년 10월 서울의 장기형이란 사람이 “호남에서 민요(民擾)를 일으킨 정한순이란 사람이 필경 군대를 몰고 크게 진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죄로 체포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1862년 함평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전국의 70여개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가운데 가장 조직과 규모 그리고 투쟁방법 등이 치밀했던 것 중의 하나로 계속되는 민중항쟁과 드디어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으로 계승 발전되는 것이다.


함평에서 동학의 전파와 농민군의 전투

경주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19세기 말의 위기 속에서 안팎으로 시달리는 농민대중에게 평등과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복음이었다. 그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안식회이기도 했다.

초대 교주 최제우가 처형당하고 2대 교주 최시형이 박해를 피해 산간으로 도망쳐 다닌다. 하지만 동학의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파되어 충청, 전라도에 미치게 되었고, 함평에도 동학사상에 접하게 된다.

함평에 동학이 언제 전파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무장의 손화중파가 호남의 대표적인 조직이었음을 볼 때 일찍부터 함평에 전파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유명한 동학 접주 이화진의 본거지가 함평이었으며, 그의 고숙으로 덕망이 있던 흥성장씨 옥삼 형제들의 참여, 함평읍 출신으로 군산첨사를 역임했던 이태형이나 학식이 있던 해보면 출신의 진주정씨 평오의 참여는 함평지역 동학 세력의 활발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함평은 일찍부터 동학사상이 전파되었고 그 세력 또한 왕성했다. 그러한 관계로 갑오농민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동학 농민군의 3월 봉기가 시작되고 농민전쟁이 발발한다. 백산에 운집한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거쳐 영광에서 4일간을 머문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이 함평에 당도한 것은 4월 16일 저녁이었다.

당시 함평의 관아에는 현감 권풍식을 비롯한 150명의 수성군, 그리고 각 면의 사림 1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6, 7천여명이나 되는 농민군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었고 모두들 물러간다.

함평을 점령한 농민군은 22일 장성으로 떠나기까지 7일간이나 머물면서 주민들의 참여 속에서 시가행진을 했고, 전열을 정비하고 세를 돋우는 작업을 하는 동안 현감이나 관속들은 물론 수성군으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는 함평의 관군이 농민군에게 방관 내지는 투항을 했음을 뜻한다. 연전연승하던 농민군은 우금치전투의 참패로 치명상을 입고 장흥 석대들 전투를 끝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함평을 포함한 전남지방은 농민군의 최후 격전지였다. 이런 연유로 엄청난 인명이 살상당한 살육의 현장이요, 약탈의 대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의 뒤를 쫓으며 남하하던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또 그들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토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서 농민군이나 그 가족 그리고 양민들은 이곳, 저곳에서 쓰러져 갔다.


삼정들에 울렸던 농민군의 함성

   
 
   
천여명이 기포한 함평의 농민군 가운데는 고위 관직을 역임한 인사부터 학식과 덕망이 풍부한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가운데 함평의 대접주였던 이화진은 손불면 장동마을 출신으로 그의 고숙인 흥성장씨(興城張氏) 옥삼에게 참여를 권유하게 되고, 옥삼은 형인 경삼과 아우 공삼 등 3형제가 농민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흥성장씨 삼형제가 살던 마을은 현재의 신광면 계천리 사천마을이었다. 사천마을은 흥성장씨의 동족마을로 중조 영(英)의 8세손인 이길(以吉)이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참여하고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당시 인근에서 학식과 후덕한 성품으로 인정받던 이들 3형제가 혁명군에 참가하니 부근의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괴치마을 앞들에서 군사훈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장씨 삼형제가 군사를 조련한 곳이라는 뜻으로 “삼장들”이라 불리게 되었다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삼정들”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들은 이화진과 함께 농민군의 대장으로 참여했다가 장경삼은 1894년 12월 9일에 장옥삼·공삼은 다음해 2월 17일 함평에서 죽는다. 그리고 그들의 집은 헐리어 함평관아의 객사 재목으로 사용되는 비운을 맞는다.

당시 비참하게 죽어간 삼형제와 농민군들을 위해 동학농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997년 중조의 21세손 원석(源碩)의 사재 희사와 추진위원회의 노력으로 세워져 당시 죽어간 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고 있다.

이제 삼정들에는 외세의 침투 및 봉건체제의 착취와 탄압 속에서 위기의 사회를 구하려던 농민군의 함성은 들리지 않는다. 그저 천직으로 여기던 농사일을 사계절에 맞춰 세상을 상대하려는 농부들의 버거운 삶의 모습뿐.

농민군들이 바라던 것은 부귀도 영화도 명예도 아니었다. 실패 후 상상을 초월하는 혹독한 결과가 그 끝에 있다는 것이 자명함에도 그들은 나섰다. 그들은 바라던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후회하지 않았으리라.

지금 삼정들에는 천여명 농민군의 피맺힌 외침만이 귓전을 맴돌 따름이다.


신영호의 문화산책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
전남 함평군 함평읍 중앙길 80  |  Tel : 061-324-5900  |   : Fax 061-324-5901
등록번호 : 전남아00248  |  등록년월일 : 2007년04월17일  |  발행인 : 김진  |  편집인 : 신승수  |  편집국장 : 김성태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수영
Copyright © 2007 - 2019 함평·로컬타임즈.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