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댁할머니가 고무신 바람으로 뜀을 뛰네

산내리(함평 해보면) 마을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다.
그 옛날에는 질박한 흙바닥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꿈쩍하지 않을 기세의 콘크리트 바닥이 턱 버티고 있다.

그렇게 많지 않은 자동차들이 가끔은 이곳을 가로질러 가고, 지금처럼 추수철이면 가을걷이 해놓은 나락들을 말리는 데 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그런 용도엔 이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흙바닥보다 훨씬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을 속 미술관 ‘잠월미술관’이 지난 여름 마을미술프로젝트 <선돌할매의 산내리별곡>을 진행하는 동안 이 낯두꺼운 콘크리트 바닥이 왠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리 오래지 않은 어린 시절 흙바닥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하고 뛰어놀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바닥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다가 발로 지우고 또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못지않은 신나는 놀이들이 가능했었다. 그런 흙바닥에선 뛰어놀다가 엎어져도 툭툭 털면 그만이었는데 콘크리트 바닥은 행여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피멍자국을 만들어 놓는다.

지금 산내리에는 그렇게 뛰어놀 아이들은 없지만 할머니들에게 흙바닥에서 놀던 기억은 있을 것이다. 이 무심한 콘크리트 바닥에 웃음소리, 뜀뛰는 소리를 입혀보자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렇게 마을미술프로젝트의 공터바닥그림은 시작되었다.

<선돌할매의 산내리별곡> 첫 작업 ‘사방치기·윷놀이·미로찾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해봤음직한 사방치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윷놀이, 그리고 호기심과 탐험심을 당기는 미로찾기! 이것이 마을미술프로젝트 <선돌할매의 산내리별곡>을 알리는 첫 번째 작업이었다.

7월 초 예상보다 장마가 길어지고 개인 날보다는 비 오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작업의 시점을 정하지 못하고 맘고생을 했던 명현철 작가는 드디어 햇볕 좋은 어느 날 마을을 찾았다.

작가의 작업 기획안을 보시던 마을 할머니들은 여타의 설명도 필요없이 수다스러워졌다. 할머니들에게도 사방치기는 친숙했던 것이다. 단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뿐….^^
“이거시 머시드라….”
“금 그어놓고 돌 던짐서 하덩 거 아니여?”
“아따 이것도 몰라? 요러게 요러게 뛰는 것이제!”

놀이 방법에 의견이 한참 분분하더니 결국 효덕할머니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마을 정자에서 뜀을 뛴다. 뜀을 뛰는 모습은 불안하기만 한데 어째 얼굴은 애들마냥 흥분돼 있다. 하하하, 아직 작업이 시작도 안됐는데 할머니들은 작업안만을 가지고도 신이 난 모양이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으며 잊혀졌던 규칙도 찾아내고, 니가 옳거니 내가 옳거니 재미난 이야기거리를 찾은 듯하다. 그렇게 더운 여름날, 할머니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관심 속에 바닥그림은 진행되었다.

“아따 이것도 몰라? 요러게 요러게 뛰는 것이제!”
작업이 마쳐지고 <마을잔치-산내리의 여름> 행사 때 공터바닥은 주민들과 관람객들이 함께 노는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기산할아버지는 행사 때 쓰신다고 며칠 전부터 윷 두짝을 만들어놓고 이 날을 기다리셨다. 예전엔 “깡재기를 윷이랑 휙~ 던져불었는디 요즘은 그런 게 없어” 하시며 스텐레스 종지그릇을 찾으셨다. 어느 틈엔가 마을에 몇 분 안되는 남자 어르신들이 윷판 주변으로 모이셨고, 윷판이 조금 좁지 않냐는 내 말에 “아~ 이래야 낙(落)이 많이 나서 더 재밌제~” 하며 웃으신다. 모야~~ 윷이야~~~ 무릎을 탁탁치는 할아버지들 몸짓이 일품이다.

할머니들은 마을을 찾은 어린이들에게 사방치기 시범을 보인다. 사실 요즘 아이들에게 사방치기란 얼마나 생소한 것인가. 조그마한 돌을 들어 던져보고, 깨금발 뛰는 놀이를 해본 적이나 있을까. 바닥에 그려진 숫자들이며, 그 어떤 설명도 없는 이 알록달록 게임판이 신기한 아이들이 무턱대고 뛰는 게 안타까웠던지 외동댁할머니가 고무신 바람으로 뜀을 뛴다.

아이들도 따라 뛰는데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두 발을 다 딛는 곳은 버거운지 넘어진다.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며 쉬다가 그 모습에 배꼽을 쥔다.

무심한 콘크리트 바닥에 웃음소리, 뜀뛰는 소리
이날 이후로 마을의 공터 바닥은 사람이 모이면 윷을 놀고,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찾으면 깨금발을 뛰는 즐거운 곳이 되었다. 미로찾기도 어른들에게 종종걸음으로 출구를 찾아나서는 놀이공간이 되었다.

콩콩콩…
뜀뛰기로, 윷으로, 종종걸음으로
무심한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려
심장박동을 집어넣어 잠을 깨우고,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할머니의 수다로,
할아버지의 “윷이야~~” 환호성으로 고요한 산내리를 깨운다.

영 변할 것 같지 않던 콘크리트 바닥이 차츰 숨을 쉬게 되었다. 단지 작가의 페인트칠 하나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할머니들의 기억에서, 엄마랑 아이가 함께 뛰는 모습에서, 지켜보는 이들까지 즐거워지는 기가 막히는 풍경에서 잠자던 콘크리트 바닥은 다시 깨어나고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 나도 큰숨 한번 몰아쉬고 뜀뛰기하러 미술관을 나가 마을공터로 달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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