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이 지난 23일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엄수 되었다.

평생의 염원이던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식을 했던 바로 그곳이다. 85년의 생애를 통해 이 땅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권의 신장,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시대의 중심에 서서 사자후를 토하며 온몸으로 궁행하던 고인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묻혔다.

고인을 가장 핍박하고 탄압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택과 고인의 가장 가까운 후견인이었던 고 정일형 박사의 유택과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어서 이를 두고 뒷담화가 무성하지만 사랑과 용서, 화해를 삶의 화두로 잡고 살아온 인간적인 김대중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화두이리라.

고인의 정치적 역정과 삶에 빗대어 고인을 칭하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스스럼없이 쓰고 즐겨 쓰는 것은 고인의 좌우명이나 다름없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최선봉에서 투쟁하던 ‘민주투사’ ‘민주영웅’ 정치인 김대중이 꾸밈없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김대중의 면모 때문이다.

고인의 인간적인 면모는 영결식 이틀 전에 유족이 공개한 2009년 일기에서 발췌한 ‘마지막 일기’인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를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일기는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방긋 웃게 하는가 하면, 종주먹을 쥐게 하고 눈물나게 한다. 항간의 문인들이 정치적인 언어를 문학적인 언어로 승화시킬 줄 아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고인을 상찬한 것이 명불허전임을 짧은 단문의 행간에서도 확인이 된다.

‘하루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2월7일).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 한다.'(1월 11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5월 30일). 평생의 반려자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부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국장에서 영정을 들고 있었던 손자에 대한 애틋한 배려는 죽음을 예감한 유언으로 읽힌다.

또한 `용산참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나 눈물겹다.'며, 설날의 소감으로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아파했다. 극히 일부를 발췌한 일기지만 고인이 92년 대선에서 자주 쓰던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나라를-' 이라는 정치적 수사가 감성적 수사가 아니라 고인의 철학과 소신, 삶에서 우러난 지극히 곡진한 언어임을 확신하게 했다.

4월24일 일기는 14년만의 고향방문에 대한 소감인데, 하의도 고향 방문전에 함평역에서 함평방문을 환영하는 지역민에게 격려 말씀을 하시고, 나비축제장에 들려 불편한 몸으로 기념식수까지 하시던 생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85회 생일날인 1월 6일 일기는 85년 일생을 몇줄로 요약한 압권이다. `-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며,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1월7일)고 단언하며 인생을 예찬하고 역사를 낙관하시며 살아있는 자에게 삶에 대한 용기를 북돋는다.

한가지 수사로 칭할 수 없는 고인은 영면하셨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행동하는 양심으로'사랑과 용서, 화해를 위해서는 `햇볕'이 필요하다. 그늘진 곳에 `햇볕'을, 낮은 곳에 `햇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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