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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최고 수군지휘본부가 있었던 대굴포
신영호의 문학산책  |  webmaster@n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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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8.03  21: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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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에 능동적으로 대처키 위한 수군본부

옛 학교역을 지나서도 10여분이 지나서야 대굴포는 자리 잡고 있었다. 나주의 동강으로 향하는 동강대교 밑으로 흐르는 영산강 지류와 강물에 출렁이는 쪽배 몇 척, 이따금씩 지나치는 모래를 실은 바지선, 끼룩대는 물떼새…. 여느 강변의 정경 같지만 한가롭기만 하다.

   
  ©학교면 곡창리 대곡
   
함평에서 가장 수려한 강촌 풍경을 지닌 이곳은 이 고장에서 몇 곳 남지 않은 옛터가 있다. 바로 이곳에 600여년전 전라도 수군을 지휘 통제하던 수군본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말, 몽고의 침략과 삼별초의 난에 이은 왜구의 출몰은 함평을 비롯한 서남해안 지방에 커다란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조선 초기까지에 이르는 왜구의 침입은 농·어촌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교통과 통신의 마비는 물론이고 조운(漕運)에도 커다란 피해를 주게 된다.

고려 초, 전국에는 13개의 조창(漕倉)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평야지대이자 미곡의 생산지였던 전라도에는 6개의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농경사회였던 당시,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고려 말 공민왕 때부터 극심해진 왜구의 조운선 침탈과 조창 방화 등은 우왕대에 이르러 조운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다.

전라도에서 왜구의 침입을 가장 많았던 지방은 순천이며 다음은 광주와 장흥이다. 함평 또한 왜구의 침략에서 예외일 수 없었고 이는 기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신우(辛禑)조에 따르면 왜가 靈光·長沙·牟平·咸豊 등지에 침입하고 또 海州·平州 두 주에 최영에게 부월을 주어 원수(元帥) 이희필(李希泌), 김득제(金得齊), 양백연(楊伯淵), 변안열(邊安烈), 우인열(禹仁烈), 박수년(朴壽年), 趙思敏(조사민), 康永(강영), 柳濚(유영), 柳實(유실), 朴修敬(박수경) 등과 더불어 이를 격퇴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구의 함평 침략에 관한 기록은 이 기록이 유일하다. 하지만 인근 지역인 영광이나 목포, 나주 등지에 왜구의 침략 기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함평의 피해는 기록 이상일 수밖에 없다.

왜구에 무차별적인 침입을 당하면서도 소극적인 대처로 일관하던 고려 정부는 공양왕대에 이르러 왜구에 대한 대책이 크게 변화한다. 공양왕 3년을 계기로 수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재편되어 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상황은 조선 개국 후에 더욱 활발히 진행된다.

즉, 해상방어의 요충지인 충청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에 도만호와 만호를 배치하게 된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남해안은 물론이고 서해안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서도 경상도와 전라도에 더 많은 숫자의 만호가 배치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왕조실록의 기록인 태조, 정종, 그리고 태종 년간에 기록된 왜구의 침략 기사가 35건이나 실려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해 조정에서는 다각적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고 전국의 8도에 마병(馬兵), 보병(步兵), 기선군(騎船軍)을 배치하는데 그 수가 20만 8백명에 이른다.

조정의 적극적인 대책이 이어지자 왜구의 활동범위는 남해안으로 국한되어 갔고 이에 따라 수군 진영 또한 왜구의 침입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대마도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

이러한 시대 상황 하에서 태종 8년(1408) 12월에 전라도 수군절제사는 당시 옥구에 상주하던 전라수영은 지리적으로 해상방비에 합당한 곳이 아니라며 대굴포로 수영을 이전할 것을 상계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 권 16, 태종 8년, 12월 정유조(條)에 잘 나타난다.

   
  ©영상강의 한 주류인 대굴포의 전경
   
옥구 수영(水營)은 해로(海路)의 중앙이 아니기 때문에 진수(鎭戍)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비옵건대, 수영을 모두 옥구진에 소속시키고 海島의 중앙에 있는 무안현 대굴포로 수영을 옮기소서 …

이 기록을 보건데 옥구 수영은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왜구의 침입에 대해 시급히 대처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영(移營)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대굴포로 옮겨진 때는 이 상계가 올려 진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 무안현조(條)에 의하면 대굴포에는 수군처치사영이 있고 대선 8척, 중선 16척, 군사 1,895명이 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만 보아도 대굴포 수영은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대굴포로 전라수영이 옮겨진 이후 대굴포에서 발생한 가장 큰 대외 활동은 대마도 정벌이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협에 위치하며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해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야만 했다.

때문에 대마도에 기근이 심할 때면 그들은 해적으로 돌변해 해안을 약탈했는데 고려말부터 극심해진 왜구의 침입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말 이후 대마도 정벌은 모두 세차례에 걸쳐 단행되는데 그 첫 번째는 고려 공양왕 1년(1389) 박위의 정벌이었고, 두 번째는 태조 5년(1396) 12월에 이루어진 김사형(金士衡), 남재(南在), 신극공(辛克恭), 이무(李茂) 등이 5도의 병선을 모아서 공격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 대마도 정벌이 바로 대굴포와 관련되는데 이를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한다. 당시 왜구는 흉년으로 인해 중국의 해안으로 향하던 중, 충청도 비인현의 도두음곶(현 충남 서천군 동면 두둔리)과 황해도 해주 연평곶(延平串)에 침입해 노략질을 자행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병선 227척과 17,285명의 군사를 주고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이때가 세종 1년(1419)으로 『세종실록』권 4, 세종 1년 경신조(條)에 의하면 박초와 우박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병선과 군사 및 군기들을 점검한 후 징발하기 위해 나주에 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른 기록으로 『금성일기』에 유습, 박실, 박초 등이 각각 5월에 대마도를 정벌할 일로 나주에 지나갔다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당시 대굴포가 서남해안 수군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 정벌을 위해 대굴포 수영을 통한 병선과 군사의 징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라 좌·우수영으로 분리

이렇듯 전라도 수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대굴포 수영은 굴곡이 심하고 포구가 좁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위기에 제때에 대응하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굴포에 전라수영이 옮겨진지 20년이 지난 1429년(세종11년) 4월 전라감사는 병선을 난양(蘭梁)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다.

   
  ©학교면 곡창리에서 나주시 동강면으로 통하는 동강대교
   
그리고 전총제 이각은 전라감사의 장계에 부연하여 대굴포가 목포만호의 포구에서부터 2식경, 즉 60리 정도 떨어져 있고 조수가 급변하여 선박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영(移營)을 건의한다. 이영(移營) 장소로는 다경포(현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말흘포( ? ), 목포(현 목포시 만호동), 주이포(현 함평군 함평읍 주포) 등을 들고 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도순찰사 정흠지로 하여금 이영(移營)장소를 물색케 하고, 같은 해 10월 1408년 12월에 옥구진으로부터 이설이 논의된 후 수군본부가 설치된 후 1432년 10월 목포로 옮기기까지 23년간 유지된 전라도 최고의 수군 지휘부였다.

이후 목포에 있던 수영(水營)은 세종 22년(1440) 해남의 황원(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성종 10년(1470) 1월 내례포에 주진(主鎭)을 두어 수군절도사를 배치하자는 이극배의 상계에 의해 해남 황원의 전라도 수영이 수군절제사영인 전라도 우수영이 되었고 당시 순천부 내례포(현 여수)에 전라도 좌수영이 설치된 것이다.

전라 좌·우수영으로 분리되기 전의 대굴포는 조선 초기 전라도에 있던 단 하나의 수군 최고 지휘본부로 왜구의 침탈을 막았다. 세종 1년 6월에는 대마도 정벌을 위한 서남해안 지역의 군사와 병선들의 집결지로서, 또 이와 관련한 지휘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역사문화관광 테마파크를 조성하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대굴포는 함평에서는 보기 드문 옛터이다. 하지만 현재의 대굴포가 수영이라는 흔적은 찾을 길 없다. 그저 병선들이 정박했었을 옛터로 들어가는 길목에 홀로 서 있는 표지판이 전부이다.

   
  ©대굴포 수군지(배들이 정박했던 포구였을 것으로 추정)
   
그렇다면 이렇듯 중요한 옛터를 방치하고만 있을 것인가 ? 보존 방안을 살펴보자.
먼저 철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굴포 전라수영터는 2003년 동신대 문화박물관에 의해 자세하고 정밀한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지표조사로 인해 많은 것이 밝혀졌고 수영 부근의 옛 건물터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명 또한 많은 부분들이 밝혀졌다.

먼저 1667년 폐찰된 대굴사의 조사와 복원이 실시돼야 한다. 당시 현감으로 부임했던 어진열에 의해 폐찰된 것으로 알려진 이 대굴사를 발굴 조사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복원까지 해야 한다. 용천사를 제외하면 옛 사찰이 없다시피 한 함평의 현실에서 대굴사는 훌륭한 문화자원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배의 통제소가 있어 불렸다는 수통막(水統幕), 동쪽의 초소였다는 동막(東幕), 외래객을 맞이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빈정(賓亭), 마을사람들이 양창(糧倉), 창골, 창등이라 부르는 기록상의 강소창(江所倉), 선소창(船所倉) 등이 있다.

이들의 철저한 발굴조사와 함께 그에 따른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다음으로 주변 관광지와 조화를 이루는 테마공원을 만들자.
수군본부 터가 있던 인근 지역인 곡창리 산 6-21번지에 골프장이 건설돼 있다. 이미 건설되어 운영되고 있는 골프장에 환경피해 등을 따질 시기는 지났다. 현재의 골프장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역사문화관광 테마파크를 조성해야 한다.

앞서 밝혔듯이 학교면 곡창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촌 풍경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건물지를 발굴조사를 통해 복원하고 주변에 산재해 있는 자연 경관들이 - 지네같이 생겼다고 해서 불리는 지네봉, 남성의 성기와 닮아 불리는 성기바위, 책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같아 책봉이라 불리는 층층 바위 등 - 조화를 이룬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이들과 인근 골프장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테마 공원을 조성한다면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옛터는 조상들의 흔적이고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 옛터들이 무참히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길이 뚫리고 도로가 포장되면서 그 흔적들이 포크레인에 불도저에 또는 사람들의 무감각 속에서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오래 전 선조들의 삶에 대한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옛터, 이런 것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옛것과의 통로가 단절되어 갈 때 느끼는 서글픔은 클 수밖에 없다. 옛것과의 통로가 그렇게 끊길 때 민중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가슴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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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
자주 뵙으면 합니다..영호형 파이팅
(2007-08-06 14: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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