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재 선생을 배향한 자산서원

시월 중순, 햇살 좋은 날 자산서원을 찾아나섰다.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 도로가에 하마비는 없고 자산서원 표지석이 나타난다.

분주한 가을철이여서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중년의 아낙네가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햇살 속으로 질주하고 오토바이 굉음만 요란하다. 가까운 숲 속에서 어린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지저귀는데 어리광이 느껴진다.

왼쪽 야트막한 산아래 고성정씨 문중의 선상에 몇 기의 분묘와 빗돌이 서 있다. 폭 5미터 정도의 서원 가는 길엔 시멘트를 깔았다.
길 오른쪽엔 이곳에 배향된 곤재 정개청 선생의 시비가 서 있다.

오막집 한 시렁에 가득한 책만 읽다가
백년도 한 인생 반이 흘렀네
마음 위에 품은 뜻은 현성의 일 뿐인데
세상사람 귀현함을 바라봄이 없소이다.

곤재 정개청 선생은 많은 시를 썼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은 20여 수 뿐이다. 그 중 위에 작품은 한국명시 100선에 실렸으며 그의 성품을 잘 나타낸 가작이다. 일생 동안 책만 읽다가 인생의 절반을 보냈는데, 그가 바라는 것은 공자 같은 성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존귀하고 이름 높음을 꿈꾸어 본 적은 없다. 오직 성인처럼 수양이 깊어 높은 도에 이르기를 바랄 뿐이다는 내용을 담은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진정한 유학자로 정치적으로 큰 뜻을 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정치사의 가장 시끄러운 역사 가운데 휘말려 희생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비를 지나니 단풍나무 그늘 아래 돌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다.

큰 길에서 100여 미터에 이르는 지점에서 길은 끝나고 왼쪽 둔덕 위에 열일곱 개의 돌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니 외삼문이 있다. 외삼문 오른쪽 향나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이곳이 선비의 집임을 말해준다.
외삼문을 통해 서원에 이르니 일자로 뻗은 대리석 길이 나타난다. 선생의 곧은 지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 길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맞바라보고 있다.

동재(자산서원)는 중앙에 확 트인 마루공간이 있고 좌우에 방이 있는 건물로 유가의 정신처럼 단청이 없어 소박하게 느껴진다. 마치 새로 지은 건물처럼 송진냄새가 겨우 가신 이 건물은 담백함을 풍긴다.

서재는 오래된 건물로 기둥에 검은 기름칠로 보이는 도료를 칠했다. 그 건물 역시 중앙에 검은 문이 있는데 산뜻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엄숙함을 자아낸다. 매우 간결하고 갈앉은 분위기를 풍긴다.

좌우의 동·서재 중앙에서 바라보면 일자로 구획된 담장이 있다. 그 중앙에 내삼문(謙噓門)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안의 경내에는 동백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다.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서원이다.

강학공간과 종교공간 사이를 4~5m의 높이를 두어 격을 달리한 옛사람들이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면이다. 외삼문(大道門)도 그렇지만 내삼문도 팔작지붕으로 조선 선비의 곧은 정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겸허문 뒤편으로 뻥 뚫린 하늘의 허공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지만, 그러나 충만한 하늘이다. 조선 선비들은 하늘에 가득한 어떤 것을 보았을 것이다.

오른쪽 담장 끝에 스무 그루 남짓의 소나무가 억새를 앞세우고 가을 햇살에 졸고 있다. 가장 평안한 시간이다. 얼마 후면 몰아닥칠 겨울 바람을 견딜 내공을 쌓고 있는 중일 것이다.

추운 것이 있으면 더운 것이 있고 뜨거운 것이 있으면 차가운 것이 있음으로 해서 더욱 단련이 되는 이치를 소나무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서원은 너무 높지 않은 위치에서 들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엔 낮달이 있는 듯 없는 듯 떠 있다.

그저 향리의 유생들 책 읽는 소리만 들렸어야 할 이 서원 위에 오늘은 한가롭게 낮달이 떠 있지만, 그러나 지난 300년 동안 자산서원은 조선 정치사의 한가운데에서 바람을 맞으며 훼철되기를 네 차례, 다시 복설 되기를 네차례 소용돌이를 맞기도 했다. 그것은 곤재 정개청이라는 유학자를 돌러싼 이해관계 때문일 것이다.

곤재 선생은 누구인가?

곤재 정개청은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일찍 초시에 합격한 후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했고 중용 ․ 논어· 맹자를 연구하고 천문과 역학의 오묘한 뜻을 해독했다고 전해진다.

외로운 학문 수련기를 거쳐 역사·지리·약학에 넓은 안목을 보이자 선조의 신임을 받았고 여러 정승 등의 천거가 있었으나 숙배만 하고 돌아 왔고 현직 벼슬로는 곡성 현감 겸 남원 진관, 병마절제도위 8개월 재직뿐이다.

중년에는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에 정착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는데,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나덕윤, 안중복, 송제민, 좌의정까지 오른 남이공이 그의 제자들이다. 반드시 자질과 성품에 따라 가르치되 귀로 듣고 마음으로 알게 한 후에야 가르침을 그쳤다는 교육관이 오늘까지 전한다.

1589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전주 태생이며 나주에서 활동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고 임금에게 고하면서 기축옥사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조정내외의 광범위한 파문을 일으키는데, 곤재는 같은 해 12월 호남유생 정암수를 비롯한 50인의 상소에서 정여립과 같은 역당이라고 거론돼 옥사에 휘쓸리게 된다. 이때 곤재의 죄상으로 들춰진 것은 정여립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고 아설을 서로 고취하여 배절의란 글을 지어 후생들을 기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곤재가 지었다는 배절의의 골자는 ‘성리학의 학문과 예법을 따르지 않는 절의란 성인이 추구해야 할 중용의 도가 아니다. 동한의 절의와 진나라의 청담은 나라를 망친 것이다’는 내용이다.

정개청은 서인도 동인도 아니다. 학문에만 전념한 선비였다.
다만 서인의 총수라 할 수 있는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곤재의 제자 중 남인이 많자 남인쪽에서 선생의 유배를 반대했고 이 과정에서 남인 아닌 남인이 되어버렸다.

어찌됐든 재판이 열리고 곤재가 정여립의 집터를 봐줬다는 죄목이 크게 지적돼 투옥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된 지 한 달후 함경도 경원에서 죽었다.

정치인이 아니면서도 당쟁 여파 속에서 높이고 깎이기를 반복했던 대학자 곤재 정개청. 평범한 재야지식인에 불과했던 그가 양파의 주장에 따라 극렬하게 희생을 당하며 약사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은 자신의 혁명적 사상을 후학들에게 암암리에 심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이 호를 곤재라 지은 것은 ‘지금의 곤란은 다음날 자손만대에 있어서 무궁한 발전을 일으킨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어 정치사회 經世에 기꺼이 초석이 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곤재의 저서로 오늘날 빛을 보고 있는 『우득록』도 그렇다. 愚는 글자 그대로 ‘미련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우둔한 재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곤궁을 겪으면서 진리를 알아 얻어낸 것을 기록한 서적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극히 겸손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곤재는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의 역량으로 보아 크게 현달하진 못했지만 조선시대 사회를 해박한 지식으로 꿰뚫어 민중과 괴리된 정치를 비판했던 학자였다.


자산서원 연혁

자산사원은 조선중기 호남사림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고재 정개청(1529~1590)이 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1616년 무안현(지금의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에 곤재를 봉사하는 서원을 설립하여, 1678년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곤재 정개청이 선조대부터 숙종대까지의 조선정치사의 전개과정에서 연좌되어 죽은 후, 그를 봉사하는 서원의 건립과 사액을 둘러싸도 조신(朝臣)과 재야유림간에는 상반된 견해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배향한 자산서원은 수차례에 걸쳐서 훼철과 복설을 반복하게 된다.

즉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들은 체포·처형되고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다. 서인인 정철(1536~1593)은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 그동안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정개청을 비롯한 이발·이길·최영경·정언신·정언지·정창술·이산해·나사침·나덕명·나덕준 등 수많은 남인호남사림들을 숙청하였다.

그 후 1591년 정철이 실각되고 이데 기축옥(己丑獄)의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1579년 전의금부도사 나덕명 등의 상소를 필두로 하여 1603년 성균관 유생 최희남, 1609년 겨울 나덕윤, 1616년 류광열강·봉현·나원길 등의 계속되는 신원상소로 정개청은 역적의 누명을 벗고 이때에 그를 봉안하는 사우도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정개청서원은 광해군대에 신원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고 서원까지 건립하여 우세를 보이던 중,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또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즉 1624년 6월 22일 김장생이 정개청서원은 공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훼철을 주장하게 됨에 따라 조정에서 훼철이 논의 되었다. 그럼에도 1625년 7월에는 정개청의 직첩이 환급되고 관작이 내려지게 된다.

그러나 뒤이어 1657년 9월 25일 서인의 贊善 송준길과 侍講官 민정중이 다시 정개청서원 훼철을 논의함에 따라 결국 정개청서원은 1차 훼철이 시행되어 위판이 모두 불태워지고, 재목은 헐리어 마굿간을 짓는데 사용되어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처럼 정개청서원은 1차 훼철이 되자 곧 이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상소가 계속되는데, 1658년에는 정개청의 증손인 정국헌이 소를 올렸다. 그러나 政院에서 이를 제지함으로써 실패하게 되자 같은 해 4월 6일에는 남인의 중요인물인 윤선도 (1587~1671)가 정국헌의 소가 정원에서 제지당하였음을 비판하는 소를 올려 결국 남인과 서인의 대립은 격렬하게 전개된다.

그후 1674년 제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서인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자 정개청서원의 복설논의는 보다 구체적으로재론되었다. 도내유학 나적 등이 상소하고,

뒤이어 1677년 3월 우의정 허목(1595~1682)이 정개청서원 복설을 청하여 본래서원의 건립은 사림의 공론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하므로서 정개청서원은 훼철(1657년 1차 훼철)된지 20년 후인 1677년 그 자리에 22간 규모로 다시 복설되었다.

일단 서원복설에 성공한 곤재학통의 호남사림들은 곧이어 1678년 11월 4일 전라도유생 서국빈 등이 청액소를 올렸고, 이 소에 따라 조정에서는 자산서원이라 사액하였다.

그렇지만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는 일대 숙청사건이 일어나 정국은 다시금 서인이 장악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근 100여명의 남인이 처형당하고 그해 윤 8월 16일 전라감사 임규의 청에 의하여 같은 해 12월 26 일 자산서원은 다시 2차 훼철을 당하게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해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그해 4월에 전라도유생 나두하 등이 서원중건 청이 받아들여져 자산서원의 액호가 재하사된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690년 6월 29일 서원에 실화사건이 발생하여 동 ․ 서재와 강당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때 전라감사 이현기는 이 실화는 서원중건을 싫어하는 자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즉시 서원의 복설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당시 흉년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건립을 보지 못하고 그 다음 해인 1691년에 중건 되었다.

한편 이듬해인 1692년 3월 18일 정무서의 소에 의하여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이 재하사되었으며, 또한 서원복설시(1689년) 왕의 특명으로 『우득록』현출간 추진되어 이때 『우득록』3권과 부록 1책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해 정권을 다시 서인이 잡게 되고 남인이 몰락함에 따라 자산서원은 또 다시 훼철을 당하게 된다. 1702년 5월 26일 시강관 이만성은 이제까지 거듭된 자산서원의 치폐사(置廢史)를 약술한 뒤 자산서원 훼철을 상소하니, 이로 인하여 6월 16일 자산서원은 3차 훼철이 된다.

이때 호남사림 84인이 나주 추선사에 모여 수원훼철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다시 통문을 올리고 나주 쌍계사에서 소회를 열어 자산서원 훼철의 부당함을 제청하는 소장을 작성하는 등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서인의 장기집권으로 자산서원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가 50년이 지난 1752년에 〈濟洞祠〉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중건이 되었지만, 이 역시 1762년 11월 4차 훼철이 되었다. 1789년 8월 다시 복설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인하여 5차 훼철이 되었고 이때 단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련유적과 유물

자산서원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로는 유지에 남아있는 〈자산서원유허비〉와 자산서원 강당, 그리고 여기에 소장된 『우득록』목판을 꼽을 수 있다.

1) 자산서원유허단향비 : 1822년에 竪碑한 것으로 크기는 높이 170cm, 폭 61cm, 두께 30cm이며, 나주 정우석이 撰하고나주 임택규가 書하였으며 36행 36자가 刻되어 있다.

2) 자산서원 강당 : 자산서원(壇)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자산서원 강당이 위치하고 있다. 내부에는 〈濟洞書院重修記〉(金裕憲記) 〈濟洞祠記〉(庚申, 權命珪識) 〈濟洞祠講堂重修記〉(庚寅, 沈啓錫書) 등 현판 3?가 걸려 있으며 곤재의 『우득록』48枚가 보관되어 있다.

3)『우득록』목판 : 『우득록』은 곤재 정개청의 문집으로써 수차례 걸친 당화를 입으면서도 어렵게 보존되어진 자료이다. 즉 곤재를 배향한 자산서원이 5차에 걸친 복설과 훼철을 거듭하는 실로 호남사림계의 각축 혹은 당화를 생생하게 예증하여 주는 자료인 것이다.

『우득록』은 총 334편의 글이 실려 있는 본편 3권과 부록 상·하 1권으로 총 4권이다. 1권~2권은 論學文으로 俳節義論으로 지목된 「東漢普宋淸談不同說」을 비롯하여 論人君之學·理氣說·氣質說·禮論·太極圖說 등의 性理楮說과 議義稧序가 수록되어 있고, 3권에 疏·剳·書·祭文이 있다. 부록은 상권에 世系와 事實을 수록하였는데 洪重三撰이고, 하권에는 困齋行狀과 困齋傳(허목撰)이 실려있다.

현존하는 『우득록』판각의 수는 모두 48매에 불과하여 원래의 총 108매의 반수정도만 보존되어 있다. 『우득록』판각이 이루어지게 된 연혁을 살펴보면, 곤재의 필초본 『우득록』이 숙종에게 보여진 1689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에서 등진작업이 착수된 뒤 나만성과 나두동에 의해 고정 작업이 완료되고,

1691년 당시 전라감사 이현기가 별검 나두춘을 시켜 수백판의 각재를 도와줌으로써 비롯되었다. 당시 무아현감 홍만조는 윤세태·고원 등의 무안유생들을 모아 판각하여 1692년 여름에 완성시켰으며, 부록 상·하권의 간행은 1703년에 이루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판각의 권별 매수는 권1일 28매중 14매, 권2가 27매중 16매, 권3이 33매중 11매, 부록이 20매중 8매로 총 48매이다. 목판의 크기는 가로 64.5cm, 세로 11.2cm이며, 각자는 동일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필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화

곤재는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 ·지리·복서 등 잡학에까지 힘써 강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곤재가 제동마을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면서도 천문·지리를 멀리하지 않았으며 실제 엄다리 제동마을 뒷산에 일명 천문단을 만들어 놓고 항상 천재지변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이 천문단의 위치는 무안반도를 중심으로 한 관내가 모두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 왜구들의 잦은 침입을 관망하는 역할도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마을 뒷산에 있었다는 천문단은 작은 동산으로만 남아있을 뿐 혼천의 등 천문연구 기구는 모두 없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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