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인생'이 있어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한파가 몰아 닥쳤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숲에서도 지의류(地衣類)의 하나인 이끼는 푸른 빛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지에게 지의류는 말 그대로 옷입니다. 솜털 옷을 닮은 지의류가 있어 숲은 생명을 이어갑니다. 낙엽은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열을 내기에 대지에 안착한 씨앗이나 뿌리를 언 땅에 내리고 살아가는 다년초에게 최소한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푸른 숲도 없을 것입니다.

▲ 솔이끼 지의류인 솔이끼가 한파에 얼어붙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밑바닥 인생'입니다. 숲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 밑바닥 인생들이 건강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도 그렇습니다. '밑바닥 인생'일지언정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건강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빈곤에 처해있는 이들에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이들에게 가난의 미덕을 이야기하고, 한 걸음만 더 양보해 달라고 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만들지 않겠다는 이야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 솔이끼 얼어붙은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영하 10도를 훌쩍 넘어버린 숲의 가장 낮은 곳, 그곳에 얼음 꽃이 피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얼음 꽃 속에 이끼들이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겨울옷을 입고도 추워서 절로 '춥다!' 소리가 나는데 맨몸으로 겨울을 나는 이들에게는 고난의 시간일 것입니다. 아침 햇살에 조금씩 녹아가는 이슬을 닮은 얼음 속에 갇힌 이끼는 몸서리치는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겠지요.

▲ 솔이끼 따스한 날이면 이슬방울이었을 터인데, 꽁꽁 얼어붙었다


새벽 출근길에 골목을 돌아다니며 파지를 모으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구부정한 허리, 크지도 않은 손수레, 그녀의 깊은 폐부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이런 날은 좀 쉬었으면 좋을 터인데'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쉴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요. 추운 방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며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삭신을 움직여서라도 추위를 이겨내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처절하게 살아가는 몸짓에 눈물이 납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파지를 옮기는 것조차도 힘에 겨워하는 몸짓을 보며 이 사회의 무관심과 냉혹함이 한파보다도 더 진저리치게 춥게 느껴집니다.

'밑바닥 인생'이 있어 숲이 살아가듯, '밑바닥 인생'이 있어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단순한 적선이 아니라, 그들과 내가 공생 관계임을 깊게 깨달을 때 제대로 된 나눔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림하는 적선은 '악어의 눈물'일 뿐입니다.

▲ 솔이끼 아침햇살에 조금씩 녹아가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려고 온 힘을 다합니다. 이 존재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은 존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더 가지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 '소유'는 오로지 경제적인 가치로만 이해됩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부를 축적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는 소유의 유일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재산의 증식'이라는 것과 맞물려 있어 비인간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광기에서 벗어나려면 현대사회가 주는 풍요함 속에 들어 있는 황폐함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 삶이 곧 이웃과 정의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로서만 만난다면 우리에게 동지는 없고, 적만 존재합니다. 이런 삶의 양식은 희망이 없는 삶의 양식입니다.

▲ 이끼의 삭 서로 부둥켜 안고 추운 겨울을 나는 솔이끼의 삭


한파가 몰아닥친 숲에서 '밑바닥 인생'이 어떻게 겨울을 맞이하는지 곱은 손을 불어가며 담습니다. 텅 빈 겨울 숲을 초록의 계절에는 없는 듯하던 지의류가 자신은 얼어 터질지언정 초록의 생명을 감싸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서로 꼭 부둥켜안고 얼어붙은 이끼의 삭, 그들에게서 생명의 신비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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