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왜 저희 부부가 자본주의 삶을 버리고 자연의 품안에서 손 놀려 씨 뿌리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삶인가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면서 그 해답을 찾아 살려고 하시는 분들에게 겨자씨만큼 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고맙기 그지 없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80년대에 노동운동을 하였습니다. 저희 집사람(풀님)은 어느 섬유회사 노조위원장을 하고 저는 지역 금속노조 사무국장을 하다가 만나 서로의 삶을 일치 시켰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조국의 현실, 그 속에서 신음하면서 살아가는 농민, 노동자, 식민지교육에 물든 학생 등 참혹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저희 부부가 양심의 반역을 하지 않고 사는 길은
그길 뿐이라고 확신 하였으니까요. 어디 저희 부부 뿐이었겠습니까?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단과 억압, 착취에 대항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삶을 사셨겠지요.
그러다가 9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 저희들은 혁명을 고사하고라도 정권교체만이라도 해보자 하면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정권교체도 반통일 보수기득권세력, 미국의 교활한 식민지 지배전략, 하늘을 찌를 듯한 지역감정까지 포함해서 안되더구만요.
그해(92년)를 넘기고 많은 운동가,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나 뿔뿔이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저희 부부도 뒤를 돌아보니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80년대 말 부터 동구유럽 사회주의권의 나라들이 와해, 붕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이론이 현실화된 모습이 바로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 나라라고 믿고 있던 대다수 운동가들한테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크나큰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운동일선에서 물러난 많은 분들이 첫째로는 먹고사는 문제 둘째는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일어난 사상이론과 신념의 혼란 등이 아마 중요한 까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93년 들어서 먹고살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서른세살의 나이, 다니다만 학력(중퇴학력), 뚜렷한 기술 없음(이것은 사무 전문적 기술을 말합니다.
사실 저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선반가공 기술, 전기용접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었습니다.

제가 98년부터 지금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으니까 그 5년 사이에 이것저것 해본 것을 헤아려보니 스무가지도 넘는 직업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1톤트럭 골목행상, 참치횟집 주방보조, 택시운전사, 용접날일, 배달일, 실업자등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맛을 못보고 쓴맛을 톡톡히 양껏 맛보면서 살았습니다.

지금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니(노동운동 시절은 빼고), 그때의 여러가지 삶의 경험이 제 삶을 풍성 다채롭게 하면서 지금의 자연속 삶으로 이끌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너무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래서 참스승은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삶이 참스승님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통정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하나, 저는 운동을 그만두면서 맨 처음 운동 할 때 던졌던 질문,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삶인가’라는 화두를 늘 간직하면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전에 보았던 사회과학책들 -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주의, 김일성주의, 호지명 등등 -을 다시 한번 면밀히 읽어보고 검토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지금의 내 삶 질문에 궁극적인 대안은 더 이상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과 서, 옛과 오늘에 이르는 책들 - 철학, 문학, 역사, 종교등 -을 샅샅히 훑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닥치는 대로 밤을 세워 읽고 또 읽었지요.

사실 저는 가난한 농사꾼의 칠남매중 넷째로 때어나 재대로 하는 것이 없었어도 어렸을 때부터 책이라면 환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시절 시골농촌에 무슨 읽을만한 책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늘 책에 허기지고 굶주려 살았지요.
운동할 때는 사회과학 책들만 읽다보니 다양한 책을 볼 기회(또는 필요)가 있어야 말이지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마른 솜이 물을 빨아 대듯이 읽고 흡수하였습니다. 물론 제 나름대로 비판의 체로 엄정하게 거르면서 말입니다.

94년에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참삶인가 하는데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자연의 아들딸이다.

그러니 자연이란 어머니 품속에서 살자’ 였습니다.
‘자연의 어머니 품속에서 사는데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씨 뿌리는 삶, 즉 농사꾼의 삶’이라고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순한 것 같은 결론을 내리기까지 위에서 말씀드린 제 삶의 경험, 책을 통해서 얻은 앞서간 이들의 슬기로운 말씀들이 크나큰 도움을 주었던 거지요.

또한 그렇게 되기까지 아주 중요한 만남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제가 찾고자하고 살고자하는 삶을 살고 계신 분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말 그대로 자연의 농부이십니다.

무심무욕 속에서 땅에 씨 뿌리며 자족(自足)하는 삶, 그 속에 철학이며 시며 그림이며 노래며 의학이며 모두가 들어있는 삶이었습니다.

큰절 올리며 ‘당신의 삶을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지금 이 삶으로 살아 왔는데, 그분 曰 ‘이놈아 스승과 제자가 어디 있어. 모두 다 생명의 벗님이요 자연의 동무들이지’ 하하... 이런 분 이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안에 이미 ‘그러한 삶을 살도록 갖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우리 삶 속에 완전무결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설사 알고 느낀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현실관계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버릴 용기가 없거나, 적당히 그 현실관계에 안주하고 싶어서 모르는채 해 버립니다. 참 서글픈 일이지요.

돈이라는 허상따라 살기보다는 천지대자연의 생명따라 살기에는 지금의 사회가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가 봅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의 어미니 품속에서 순리(順理)대로 사는 것이 가장 평범하고 단순한 삶인데도 말입니다. 그러한 삶이 특별하게 대접받는 것도 사실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지요.

이상이 어머니 자연품에 안겨서 손놀려 씨 뿌리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이야기 입니다. 올해로 십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릅니다.

그런데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아내가 흔쾌히 그 삶에 찬성하고 함께 해 주었느냐 물으실 것 입니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문제는 어떻게 하려고 하였느냐고 또 물으실 것 입니다. 소위 귀농한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이 두가지 문제가 제일 많이 걸리더군요.

또 하나 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였느냐고 물으실 것 같은데, 사실 이 문제는 대답할(적어도 저에게는) 가치가 없는 문제입니다.

돈이라는 허깨비, 허상을 꿰뚫어보고 돈 따라 살지 않고 천지대자연의 생명 숨결따라 살려고 하는 저에게는 불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무슨 코스니, 무슨 마음수련이니 하면서 돈을 얼마만큼 가져오면 얼마만큼 깨달음을 주겠다고 하는데, 진리(깨달음)를 어떻게 값 매겨 사고 팔수 있다는 말인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값없는 천지만물에 어떻게 값을 매겨 사고 팔수 있겠습니까? 그럴 권리도, 그럴 자격도 우리에게는 없지요. 그래서 저는 사고파는 농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이 주신 고마운 선물로 알고 생명의 밥상을 나누고 모시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또 그래도 물어보시는 분이 계시면 대답해 올리겠습니다.

저희 부부도 어차피 자본주의 틀 속에서 살고 있는 바에야 어찌 돈이 안들어 가겠습니까? 정 돈이 필요하다 싶으면 건강한 몸뚱아리 밑천삼아 구들도 놓고 한옥 벽체 흙 작업도 하고 빈집 수리도 하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날일을 해서 해결합니다. 그 정도 선에서 그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생명의 밥상을 사고팔지 않는 문제), 쉽게 이야기해서 ‘농업은 상업이 되어서는(상업으로 가서는) 않된다’고 확신하는 제 신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로 하고 옆길로 샛내요.

-다음에 계속

※본란의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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