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철 조선대학교 외래교수경기도농수산진흥원 비상임 이사
조성철 조선대학교 외래교수경기도농수산진흥원 비상임 이사

 

같은 듯 다른 ‘함평농민봉기’와 ‘칼레의 시민’을 비교해보면, 함평의 농민들이 더 위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이 저항에 이은 항복이라는 면에서, 또 6인의 희생을 통해 지역민들을 구한 대목에서는 같으나, 6인의 희생이 내포한 함의에서는 함평농민봉기의 주역들이 더 위대했다는 말이다. 칼레의 시민 6인이 항복의 의례를 연출한 반면, 함평농민봉기의 주역이었던 6인은 실제 군민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전해오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에 따르면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영국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에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항복을 받은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칼레 측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게 된다.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칼레의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에드워드 3세를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미화되어 전해지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다.

하지만 칼레 항복을 기록한 약 20여 개의 당대 문건들은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이었다’고 적고 있다. 에드워드 3세는 애초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14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에 의해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된다. 칼레의 항복 속설 또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장 프루아사르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된 것이다.

‘칼레의 시민’이 영국의 침략에 맞선 저항이었다면, 1862년(임술년) 철종 때에 일어난 함평농민봉기는 부패한 왕조에 맞선 저항이었다. 함평 농민들은 불합리하게 부과된 전정과 환정 등 삼정의 모순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며 한 달 가까이 읍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5월 10일께 안핵사 이정현이 도착하자, 정한순 등 지도자들이 자수하면서 마무리된다.

정한순 등 지도자들은 ‘부채 명목으로 억울하게 징수당한 3만 냥의 징수 문제 해결’ 등 10가지 개선책인 '10조 앙진(十條仰陳)'을 제시한다.

10조 앙진을 바치고 농민군이 해산하자, 안핵사 이정현은 정한순 등을 감옥에 가둔 다음 5월 30일 최종 보고서를 중앙에 올린다. 이에 비변사는 “정한순은 사변을 빚어 현감을 내쫓았고, 더구나 그 뒤 흩어지지 않고 점거하여 오랫동안 극력 항쟁하는 죄를 범하였으니, 백번 사형해도 하나도 용서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방헌․김기용․진경심․김백환․홍일모가 함께 도와 악한 짓을 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직접 본 것이니, 이상 여섯은 모두 군민을 많이 모은 가운데 효수시킴으로써 대중을 경계시키소서. 전 현감 권명규는 3만 금에다 저채 9천 석을 더 만들어 이를 백성들의 논밭에서 거두어 들였으니, 먼 곳으로 유배를 시행하소서”라고 왕에게 진언한다.

이에 왕은 “함평현의 민란을 주동한 자를 효수하고 전 현감 권명규는 유배형에 처한다”고 명을 내린다.

6월 4일 정한순 등 주모자 6명이 효수된다. 이들 6인은 저항을 이어갈수록 군민들의 희생이 늘어날 것이라 보았을 터이고, 자신들이 희생함으로써 더 많은 군민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 터이다. 게다가 다음에 올 혁명의 씨앗을 남겨뒀으니, 이들 6인의 희생이 숭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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