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성철 (사)대한모터스포츠협회 회장, 전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평가 자문위원

 

함평의 의로운 역사 중 하나인 함평민란을 지금부터라도 함평농민봉기라 부르자. 이유는 함평민란의 내용을 성격이 잘못 규정하고 있어서다. 즉, 함평민란이 봉건적 수탈과 부패한 관료들에게 저항한 의로운 사건이라는 데 재론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폭동이나 소요라는 의미가 강한 민란으로 규정하여 부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민란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 문제로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일으킨 폭동이나 소요로 사회의 질서와 도덕을 어지럽힌다”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 철종 13년(1862년)에 함평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는 정확히 말해 폭동이나 소요를 일으켜 사회의 질서와 도덕을 어지럽힌 게 아니라,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 등에 맞서 저항한 정의로운 항쟁이었다.

그럼 먼저 함평농민봉기가 어떤 사건인지부터 알아보자.

1862년은 민란의 시대라 일컬어진다. 진주에서의 민란을 시작으로 전국 70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이 중 전라도 최초의 봉기지는 함평이었다.

함평농민봉기의 원인은 주동자 정한순의 재판 당시 진술서인 공초(供招)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 봄 이후 허다한 폐막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결세(結稅)의 징수, 관결(官結)의 가징(加徵), 허액 뿐인 환곡의 문제였다. 여러 차례 중앙과 감영에 장소(狀訴)하였고, 심지어 징과 꽹과리를 쳐 억울한 사실을 호소까지 하였으나 재가 사항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함평현에서는 감영의 관인(官印)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감영에 보고하고 형배(刑配)를 가하려고 했다.”

이 공초는 당시 세금의 징수 과정에서 부패한 관료와 아전들의 농간이 얼마나 횡행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세금에는 토지세에 해당하는 전세를 납부하는 전정(田政), 국방세에 해당하는 군포를 납부하는 군정(軍政), 흉년이나 춘궁기에 빈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는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이 있었는데, 이 셋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관리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백성들을 착취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의 부담은 과중되었다.

이 같은 수탈이 이어지자 함평농민들은 불합리하게 부과된 전정과 환정 등 삼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등소(等疏)운동을 전개했는데, 감영의 조치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 사헌부에 소장을 내고, 국왕에 대한 직소로써 격쟁을 시행하기도 했다. 등소(等疏)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수차례의 민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문제해결의 원칙만을 제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등소운동을 전개한 정한순(鄭翰淳) 등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자 정한순은 체포를 피해 봉기를 주도하여 4월 16일 14개면의 촌민 수천 명을 모았다. 이들 농민들은 대부분 죽창·작대기로 무장하고 읍내로 몰려가 저채(邸債, 경저리나 영저리가 백성들의 공납을 대신 내게 되면서 백성들이 이들에게 지게 된 빚)와 관련하여 원성이 높은 토호들의 집을 부수고 불 질렀다. 농민을 등치던 아전 등 함평현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그리고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東軒)에 진입하여 현감 권명규를 끌어내어 구금함으로써 농민들이 읍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5월 10일께 안핵사 이정현(李正鉉)이 도착하자, 항쟁의 주도자들은 수천 명의 농민을 거느리고 자수하며 10조폐막을 직소했다. 이에 안핵사는 국왕의 덕언을 선포하고 대소민인을 위무하여 봉기민들을 해산시켰다. 봉기에 관련된 22명이 진영의 감옥에 감금당했고, 6월 4일 정한순 등 주모자 6명이 효수됐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함평농민봉기가 탐관오리의 탐학과 삼정의 문란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농민들의 항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함평민란은 함평농민봉기라 부르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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