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들의 설날 차례 지내는 모습

우리 집은 천주교 신자가 많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설날 등 명절 아침이면 간단한 차례 의식 정도만 하는 걸로 제사를 지냈다. 화려한 제사상 대신 소박한 상차림에, 성서 낭독과 성가를 부르는 방식의 약식 제사였다.

천주교에서는 제사의 예식 가운데 신주를 모시거나 혼을 부르고 보내고 하는 의식은 빼고, 그 자리에서 기도와 성가·성서봉독 등의 의식으로 대체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서는 이러한 약식 제사마저도 지내지 않게 되었다.

조상 섬길 줄 모르는 집안이라서? 이렇게 말하면 우리 할머니에게 혼쭐이 날 거다. 언제부턴가 우리 집에 있던 제사상이 성당 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집이 아닌 성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성당 안에 차례상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참 의아한 모습이다. 유일신을 섬기는 천주교에서, 그것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인 성당 안에서 조상들을 모시는 차례상을 차려 놓고, 향까지 피우는 풍경이라니…. 거기다가 십자가상을 앞에 두고 조상들에게 절까지?

도대체 이건 어떻게 생겨난 모습일까?

하느님께 제사드려야 하는데, 조상에 제사? 이게 웬 일이야?

천주교는 처음에는 제사를 전면 금지하였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 만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러함에도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우상숭배를 배격하였다.

그러다 20세기 들어 교황 비오 12세가 1939년 '중국 의식(儀式)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제사에 대해 관용적 조치를 취했다. 교황은 조상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사회 문화 풍속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했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시신이나 무덤, 죽은 이의 사진(영정)이나 이름이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리는 행위 등은 허용했다.

그러나 축문을 읽거나 합문(闔門, 조상의 혼령이 음식을 드는 동안 병풍으로 가리거나 문을 닫는 행위)하는 것은 금했다. 또 위패에 '신위' 또는 '신주'라는 글씨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유일한 신은 하느님'이라는 교리 때문이다.

천주교의 '제사 논쟁'
조상제사 문제가 발단이 된 것은 16세기 말 중국에서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여러 수도회들이 선교하고 있었는데 대표적 수도회로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을 꼽을 수 있다.

<천주실의>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마테오 리치로 대표되는 예수회 회원들은 중국의 유교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천주교를 전했다. 그래서 예수회원들은 조상제사를 조상에게 효성을 바치는 미풍 양속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은 조상제사를 미신 행위로 보았다.

선교사들 간의 이런 견해 차이로 이른바 '제사 논쟁'이 시작된다. 약 100년 동안 계속되던 제사논쟁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교황령과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교황령으로 일단락된다. 이 두 교황의 교황령들은 조상제사를 미신행위로 보고 엄하게 금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제례에 참례하거나 '신주'(神主) 또는 '신위'(神位)라는 글을 써붙인 위패를 집안에 두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시신에 절하는 것 역시 금지됐다.

교황청의 이런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1790년 북경을 통해서였다. 유교 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제사를 엄격히 금한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이제 갓 천주교에 귀의한 신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천주교를 떠나기도 했다.

조상제사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례는 유명하다. 윤지충은 조상제사를 금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집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불태웠다. 그런 가운데 1791년 5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외사촌 형 권상연과 상의해 전통 제례 대신에 천주교식 장례를 치렀다. 이게 화근이 돼 이 두 사람은 전주 풍남문 밖(현재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를 당했다.

조상제사 금지에 관한 교황청 가르침이 바뀐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다. 교황 비오 12세가 1939년 '중국 의식(儀式)에 관한 훈령'을 통해 조상제사에 대해 관용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200년 전과 달리 조상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 풍속이라고 전향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지역교회법인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서는 제례와 관련해 이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사의 근본 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제134조 1항)

"설이나 한가위 등의 명절에는 본당 공동체가 미사 전이나 후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조상에게 대한 효성과 추모의 공동 의식을 거행함이 바람직하다."(제135조 2항).

이처럼 한국의 천주교에서는 조상에게 효성을 바치는 미풍양속이자 돌아가신 분께 예의를 갖추어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적 토양 위에서 자랄 때 진정한 우리의 신앙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집에서보다 더 풍성한 제사상

최근 들어 우리 집 제사상이 성당으로 옮겨가게 된 것도 이 조항(135조 2항)때문이다. 설 미사 끝에 차례상을 걸게 차려놓고, 신자들이 줄을 서서 분향과 함께 절을 하는 방식으로 성당의 합동제사는 이루어지고 있다.

어찌 보면 집에서 할 때보다 더 화려하고, 격식을 갖춘 제사 모습이다. 우리 집에서 이렇게 큰 제사상을 차려 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본 적이 있었던가.

신자들은 좋아하는 눈치다. 천주교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조상들을 기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갖가지 음식으로 잘 차려진 차례상에 향도 피울 수 있고, 가족들과 함께 절까지 할 수 있으니 전통적인 제례의식으로 볼 때도 손색이 없다.

북가좌동 사는 한 신자는 “아침부터 제사상 차리려고 부산떨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성당과 함께 조상들을 기릴 수 있어 매우 좋다. 우리 가족도 명절 때마다 성당에서 차례를 지낸다”며 설날 차례 미사에 대해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누구보다도 독실한 신자인 우리 할머니께서도 성당에서 하는 합동제사에 대해 매우 좋아하신다.

"이 얼마나 좋아.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조상들께 인사 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같이 나누고, 너 같이 성당 잘 안나오는 놈들 한번이라도 더 성당 오는 계기도 되고…(웃음)."

2008년 한 해를 시작하는 설날에도 우리 가족은 성당에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곳에 가서 차례를 지냈다.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휴가 나온 동생과 함께 한상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분향을 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할아버지의 자상한 얼굴을 떠올리며….

올 추석에도, 내년 설에도, 그 다음 명절에도 우리 집의 제사상은 항상 성당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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