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이데올로기는 '근대화지상주의'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는 처음에 행정부의 명칭을 실용정부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정부 명칭을 따로 쓰지 않고 대통령의 이름을 곧장 내세워 ‘이명박 정부’로 한다고 발표했다. 아마 추측건대 이름을 따로 쓴 이전 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정부 명칭을 따로 정하는 일은 민주화 이후라고 할 수 있는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한 일이다. 당시 김영삼은 군부독재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해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썼다. 이후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노무현은 참여정부라는 명칭을 썼다. 마땅히 이런 이름들에는 그 정부가 지향했던 국정철학이 담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명칭들은 이전 ‘제0공화국’ 하는 식의 무미건조한 명칭보다는 일면 구체적이고 현대적인 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명칭들은 정부의 성격을 온전히 규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느 면에서는 미사여구적 수식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새 정부의 명칭을 곧장 ‘이명박 정부’라고 한 것은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이것은 일단 자연스러우면서도 책임 소재가 분명하여 당당해 보이기도 하다.

아무튼 새 정부의 명칭은 ‘이명박 정부’로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새 정부의 성격은 앞으로 당사자인 이명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리 규정되게 되었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선거공약에 이미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인수위가 출발하여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무수한 정책들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마침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월 5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가 추진할 5대 국정지표와 21대 국정전략목표, 192개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인수위가 발표한 5대 국정지표는 활기찬 시장경제, 인재대국, 글로벌 코리아, 능동적 복지, 섬기는 정부 등인데, 국정지표답게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수위가 5대 국정지표의 하위 항목으로 발표한 21대 국정전략목표 역시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에 있다.

이를테면 21대 전략목표에 들어있는 일자리 창출, 평생학습 생활화, 아름다운 창의문화,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사회, 법과 원칙이 준수되는 신뢰사회 구현 등은 오히려 상위개념인 5대 국정지표보다 더 포괄적이며 추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5대 국정지표와 21대 국정전략목표에는 공통적으로 미사여구적 수식이 많이 들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통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 또는 역사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읽을 수가 없다. 정작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는 최하위개념인 192개 국정과제를 통해 비로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언론마다 나름대로의 진단과 분석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에 따라 새 정부의 국정기조를 대하는 호·불호의 온도차만 있을 따름이다.

이 글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과 성격을 역사상 인물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이명박 인수위 활동을 통해 나타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약육강식의 경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수위에서 발표한 고입, 대입 등의 입시정책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또한 연 7%의 수치를 포기하지 않은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과 복지마저도 경쟁 구조화하려는 복지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울러 한반도 대운하에서는 개발 위주의 근대적 경제철학을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이 모두를 한 마디로 규정하여 ‘근대화지상주의’라고 하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미종속주의와 영어만능주의가 이유 있게 수반되기도 한다.

정약용에서 안창호에 이르는 근대화지상주의

근대화지상주의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장덕수와 박정희 두 사람이다. 두 사람 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고, 두 사람 다 친일 군국주의자였으며, 두 사람 다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따라서 이렇게 불온한 인생을 산 인물들을 새 정부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결례일 수도 있어 일단 두 사람은 제외하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근대화지상주의는 멀리 정약용과 박규수, 유길준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약용은 당대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서양문물에 경도된 과학적인 합리주의자였다. 그는 당시 서학이라고 일컬었던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다. 그가 천주교를 먼저 받아들여서 서양문물에 경도된 것인지 아니면 서양문물에 대한 동경이 그를 천주교 신자로 만든 것인지 그 선후인과는 분명치 않다.

정약용은 매우 근검한 생활을 했지만 자식 교육열이 대단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식이 지금의 8학군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성 내에서 살게 하려고 힘쓰기도 했다. 그는 젊어서 동양적인 교양과 주체적인 사관을 지녔었지만, 자기를 아끼던 정조가 죽고 유뱃길을 전전하게 되자 조선 정치와 문물에 대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천주교 선교를 위해 프랑스군 개입을 요청한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박규수는 강화도수호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척화파였던 대원군이나 최익현 등과 대조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근대화지상주의자로 길러냈다.

다행히 정약용, 박규수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서구문물 수용론과 개화론은 나라를 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이후의 개화파들은 나라보다도 근대화 자체를 더 우선시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보여준다.

“개화한 나라는 인간의 천사만물이 지선 극미한 영역에 이르러 있는 고로….”

박규수의 제자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개화한 나라는 서구열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개화한 서구열강은 인간의 천사만물이 지선 극미한 영역에 도달해 있다는 것은 물론 환상이다. 하지만 이런 근거 없는 환상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갑신정변 같은 개화 쿠데타의 근저에는 이런 개화지상주의적인 맹목적인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은 갑신정변의 후예들에 의해 주도되어 파망(破亡)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는 개화지상주의자였던 김옥균의 몰 애국적인 행적과 비패하게 일그러진 인간성을 기억하고 있다.

개화지상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건전한 인물은 안창호였다. 하지만 그 역시 나라가 망한 원인을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데에서 찾은 점은 개화지상주의자들이나 진배없었다. 그의 ‘무실역행론’은 기실 이런 자기비하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안창호는 대성학교 교장 시절 이광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사악한 논문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에게 심대한 열등의식을 심어 주는 부작용을 결정적으로 낳고 말았다.

서재필의 대미종속주의

이명박 인수위는 대북관계보다 대미관계를 중시한다. 북핵문제도 대미관계 강화를 통해서만이 해결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는 통일부 폐지,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 재점검, 한미일 연대를 강화하는 6자회담 전략 등에서 확인된다. 동족보다는 강대국을 우선했던 인물들은 역사상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단연 서재필이었다.

갑신정변의 조교그룹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로 독립협회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란 그 개념이 ‘청의 종주권을 부인한다’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돕기 위한 방편으로 청의 종주권 부인 주장을 펼친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고문은 서재필이었다. 그리고 회장에 안경수, 부회장 윤치호(나중에 회장됨), 위원장에 이완용 등이 있었다. 임원진 중에서 이완용에 대해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음으로 안경수(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소녀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몄던 사람이다.

그 밖에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더 있었다(그러고 보면 독립협회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 밖에는 없는 셈이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대한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모든 일본인들은, 일본이 조선에 독립문을 세워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한다.

아래 독립신문 논설들을 좀 더 보기로 하자.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극동에서 다 꺼져가고 있는 약소국 조선에 가면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소국의 황제에게 독립신문을 만들어 나라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야 열강의 침략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황제는 그가 강대국 미국인이란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약소국의 황제는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했다.

황제는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소 한 마리가 20원에서 40원 정도였으니 그 돈들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구입했다. 갑신정변이라는 이름의 친일 쿠데타에 실패한 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군함을 얻어 타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도 겨우 뱃삯을 장만하여 미국에 갔던 기억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접시 닦으며 워싱턴대학에 다닐 때의 일도 떠올려 보았다.

마침내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약 그는 약소국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소국의 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소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약소국의 말이나 글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18년 동안 성장한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로 잊은 것이라면 그는 기억 상실증 환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병자는 아니었다.

약소국의 황제는 화가 치밀었다. 그 미국인이 독립이라는 위장을 쓰고 교묘히 일본의 편을 들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조정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관하는 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미국인은 갑신정변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의 하수인들이 그의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는 약소국의 조정을 협박했다. 아직 계약 기간이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임금 2만8800원과 미국행 여비 600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했다. 아니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가련하게도 약소국의 조정은 그의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들을 따로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독립신문이 일본을 많이 도왔으니 도의상 일본 측에서 신문을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신문의 매각 교섭은 귀국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으며, 의장 취임사에서 “만일 대회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의장직을 사임할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 약소국이 독립을 얻게 되자, 80세가 넘은 그는 다시 약소국에 들어와 기웃거린다. 그는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와서 그 나라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약소국에는 그의 똥 속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노회한 사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승만과 불화를 겪는다. 그는 친미 인사인 장덕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그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는 성명을 내고 다시 자기 나라 미국에 돌아가 버렸다.

윤치호의 영어만능주의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강화 방침은 가장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영어를 잘 하면 군대에 면제된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인수위가 한 발 후퇴하기는 했지만 국어와 국사 과목까지를 영어로 교육해야 한다는 방침은 이명박 당선인의 선거 공약에 분명히 들어 있다. 또한 이경숙 인수위 위원장은 '오렌지' 발언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제 한국 땅에서 영어는 권력의 수단과 무기가 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게끔 되었다. 사실 이런 가치관 역시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영어 만능 의식은 의외로 그 연원이 깊다. 우리 역사에서 영어 만능의 인생관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이가 있다면 그는 단연 윤치호이다.

독립협회 회장이기도 했던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준 적이 있다. 이토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란 것이 있다. 종로에서 열린 대규모 군중 집회였다. 이상재가 사회를 보고 윤치호가 열변을 뿜었다.

“이 나라가 칭제 건원하고 국호도 대한이라 하여 세계만방에 자주 독립을 선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궁정에는 아직도 간신, 소인배가 넘나들며, 정부는 철도, 광산, 산림 등의 국가 권익을 외국에 양도하는데 바빴고, 증회, 수뢰, 매관, 매직은 날로 더할 뿐이다. 이같이 하고서 도탄 속에서 헤매는 국민을 어찌 구제할 것이며 누란의 국운을 그 어찌 만회할 것이냐.”

아마 잘 된 연설이라고 생각했던지 스스로 독립신문에 실은 글이다. 그런데 이때가 언제인가? 을사늑약 체결 7년 전이다. 피아를 가리지 못한 이런 내부 공격과 군중 선동이 나라에 무슨 이득이 되었겠는지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논조는 그들의 선배 김옥균, 박영효가 10여 년 전 펼쳤던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17세에 일본에 유학 간 윤치호는 게이오 의숙 총장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을 이용했다가 버린 그 사람이다. 윤치호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 중 일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윤치호가 영어만능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매일 밤 영어로 일기를 쓴다고 자랑하고 다녔고 실제로 60년 간이나 쓴 일기를 남겼다. 그는 영어교습서를 출판하여 큰돈을 벌기도 한 사람이다.

영어를 누구보다도 잘 했던 조상 윤치호를 현대의 테솔 전도사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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