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피어납니다. 설날이 지나고 나니 동백이 봄맞이를 하려나 봅니다. 아직도 매운바람 불어 산 깎아 세우고 잔설이 남아 턱없는 영하의 날씨인데, 봄을 열어 보이는 동백의 진홍색 피 터짐, 빨갛게 멍이 든 꽃물을 보고 어찌 몸을 도사릴까 싶습니다.

동백만이 갖고 있는 순정과 정열이 좋아 여러 해 동안 동백을 기르고 있습니다. 시골 산속에서 동백을 키워내자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이글거리는 몸짓으로 봄을 선뜻 안겨주고, 겨우내 옴츠러들었던 가슴에 활력을 되살려내는 화끈한 맛에 곁에 두고 긴 겨울을 함께하곤 합니다.
붉은 꽃물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응얼응얼 섬을 달래는 여수 오동도, 호박엿을 달궈내는 울릉도 성인봉 숲 속, 새까만 돌들이 바다를 안달 나게 굴리며 맷돌질하는 보길도, ‘저를 아시나요’ 부르는 선운사 앞 뜰, 일본열도를 잠재우는 한산도 제승당 등… 따뜻한 남쪽나라를 거닐듯 동백꽃 세상을 떠올리며 봄맞이 여행을 떠나갑니다.
동백꽃은 한 송이만 보아도 가슴이 뜨거워 옵니다. 여러 송이가 피어 있는 것도 아름답지만 한 송이만 바라보면 더욱 곱습니다. 뒤마의 소설 <춘희>에선 동백꽃은 화려하고 멋스런 여성의 상징입니다. 요염하고 사치스런 여주인공 마르그리트는 밤마다 화려한 드레스에 새빨간 동백꽃 한 송일 달고 파티 장에 나타납니다. 온갖 남성들의 시선이 동백꽃을 단 그녀의 앞가슴 속으로 날아와 멈추기를 바라며 남자들을 작정 없이 유혹해냅니다. 저릿저릿 저려오는 이 봄날에 가슴이 시리고 허해 남자를 독차지하고 싶다면 동백의 순정과 정열을 한 번쯤 시험해 봄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동백의 동백다움은 깨끗한 마무리에 있습니다. 미련 없이 자신을 뒤로하는 모습이 화끈하고 구접스럽지 않아 좋습니다.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꼬질꼬질 매달려 몸부림치지 않아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합니다. 그러나 쳐다볼 틈도 없이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돌아서는 모습은 토라진 여인을 대하듯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동백은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건 잠깐입니다. 꽃이 핀 지 일주일쯤 지나 바람불어 설운 날, 노란 꽃술과 함께 송두리째 쏙쏙 떨어져 내립니다. 목이 댕강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툭툭 떨어지고 후드득 부서져 진홍색 피를 토하고 쏟아지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순정과 정열을 뒤로 한 채 노란 꽃술을 털어 버리고 서둘러 이승과 작별을 고합니다. 순식간에 장렬한 마무릴 하며 봄을 불러들이려고 저리 갈 길을 재촉하나 봅니다.
동백은 꽃도 꽃이려니와 잎 자체만으로도 넉넉하고 시원한 멋을 안겨줍니다. 잎은 타원형으로 둥글고 두껍습니다. 둥근 잎은 원만하고 부드러워 조약돌을 닮았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경박스레 촐싹대지 않고 항상 푸르고 윤이나 반들거립니다. 봄 내움을 받아 물기가 한창 오를라치면 푸른 잎은 생기가 돌아 이들이들 춤을 추고, 행여 이슬방울 하나 떨어져도 또르르 굴러 떨어집니다. 잎에서 풍겨나는 윤택함은 때 묻지 않은 중년여인을 보듯 신선하고 싱그럽습니다.
벌써 입춘과 설날도 지나고 우수(2.19)가 며칠 앞입니다. 영롱한 아침 햇살 아래 붉은 정열을 토해내는 동백으로 이 봄을 맞이합니다. 천년의 세월을 살고도 사랑 꽃을 이뤄내지 못한 아픈 사람들을 위해 동백은 올해도 피멍을 토하며 설움으로 피어납니다.

아! 천년 사랑 꽃, 아직도 선홍빛 꽃물을 대하면 신열이 오릅니다. 온몸에 꽃 멍을 들이며 이들이들 피어나는 새빨간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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