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어떤 남자가 애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사랑의 편지를 써서 부쳤다. 구구절절 불타는 가슴이 깨알처럼 박혀 있는 편지를 읽으면서 여자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날마다 만나서 밀어를 나눌 때보다 오히려 사랑이 애틋하고 깊어져 갔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편지 속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들이 점차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여자는 제발 돌아와 달라고 답장을 썼다. 남자는 사업상 지금 돌아가기 힘드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조금만, 조금만’이 어느새 제법 긴 세월이 되고 말았다. 연약한 여자는 낙담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남자의 편지는 여전히, 어김없이, 날마다 같은 시각에 배달되었다.

애인이 우편집배원과 결혼했다

또 세월이 흘러갔다. 남자는 어느 날 여자의 편지를 받았다. “그동안 편지 고마웠어요. 이젠 편지 그만 하세요. 저 결혼해요. 당신 덕분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같은 시각에 어김없이 만났던 남자와 정이 들고 말았어요. 이분은 당신의 편지와 함께 내 약까지 사다준 고마운 분이에요. 이런 착한 남자를 내게 보내주신 당신, 정말 고마워요. 안녕! 추신, 이 편지도 그분이 대신 부쳐준 거랍니다.”

​영어 격언 ‘Out of sight, out of mind.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를 설명해주는 예화이다.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뽀빠이로 잘 알려진 원로 방송인 이상용은 동네 형의 연애편지 심부름을 하다가 사랑에 빠져 “누나, 나하고 사귀지 않을래?” 하고는 열애 끝에 그녀와 결혼했다. 어떤 젊은이가 나에게 “여친이 해외에 공부하러 가는데, 따라갈까요? 기다릴까요?”라고 상담을 하기에 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국 작가 사무엘 존슨은 “사랑, 우정 모두 잠시 단절로 강화될 수 있지만 오랜 부재에 의해 파괴된다”라고 말했다. ‘Out of skinship, out of mind. (스킨십이 없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 찍다 결혼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스킨십이 사랑을 부른다는 말이다. 가장 극적인 예가 8번 결혼 8번 이혼으로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이다. 그녀는 1960년대 초반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찍을 때 이미 네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극중 안토니우스 역의 리처드 버튼과 실제로 결혼을 했다. 당시 리처드 버튼 역시 아내가 있었다. 두 남녀는 연기와 현실을 혼동했는지 각자 이혼을 하고 결혼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이혼 9일 만에 다섯 번째 결혼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들은 그 후 이혼을 했다가 또다시 결혼, 또 이혼을 했다. 둘 사이에만 두 번 결혼, 두 번 이혼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다.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도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찍고 결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성일-엄앵란, 차인표-신애라를 비롯하여 최근까지도 그런 사례는 심심치 않게 이어진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유명한 줄리 앤드류스는 남편인 블레이크 에드워즈(‘티파니에서 아침을’ 감독)가 감독한 영화 <밀애>를 찍다가 당대의 미남 록 허드슨과의 러브신을 너무 리얼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남편의 질투를 불러 불화가 생기기도 했다. 여자의 질투는 얼굴을 할퀴지만 남자의 질투는 나라를 뒤엎는다. 모두 스킨십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이야기다.

스킨십이 사랑을 부른다

몇 해 전 만났던 젊은 여성이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여성은 홀로 해외 배낭여행이 취미이다. 30세 전에 50개가 넘는 나라를 홀로 돌아다니다 보니 남자 친구 사귈 틈도 없었다. 대신에 출국이 잦은 그녀에게 환전 담당 단골 은행원이 생겼다. 어느 날 환전을 했는데, 외화가 더 많이 들어 있었다. 실수인가 생각했다. 다음에 환전을 하는데, 그 남자 은행원이 “그 지역은 지금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정색을 하며 말리더란다. 다음엔 디카를 선물하길래 얼떨결에 받았다. 그 다음엔 외화를 넣은 봉투에 구애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가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홀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그 은행원과 결혼을 했다. 이제 그녀는 환전이 아니라 여행자금을 외화로 무상지원 받으면서 여행을 한다고 했다.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무슨 일로든지 자주 만나면 감정이 싹튼다.

십여 년 전 국회도서관장 재직 시절 세계의 위대한 도서관을 탐방할 때 해외 주재 대사관 직원들을 많이 만나면서 놀란 것은 여성 외교관이 참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거의가 싱글이었다. 술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나라 저 나라 이동 근무를 하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기 힘들다고 했다. “태권도 사범 아니면 결혼 상대가 없어요” 하고 웃으며 덧붙였다. 태권도 도장 없는 나라가 없으니 함께 해외 근무가 가능한 남자는 태권도 사범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태권도 사범과 결혼한 여성 외교관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고 했다. 표적이 멀고 높은 데다 늘 움직이니 맞추려고 하는 궁수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대는 늘 내 주변에 있다.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에 나의 반쪽이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흔히 사내연애를 떠올릴 수 있다. 경험자로서 한마디 하면, 권장할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 <연애의 온도>는 사내연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뜨겁게 타올랐다 서릿발처럼 얼어붙을 수 있는 게 사내연애다. 깨지면 참 치사하고 더럽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게 사내연애다. 보안에 실패하면 오뉴월 마른 풀 섶에 불 번지듯 소문이 퍼진다. 사내연애의 최대 장점은 서로 간에 장단점을 잘 파악한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도 마찬가지. 언제나 화제가 마르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다. 멀리 멋지게 보이는 상대보다 가까이 든든한 사람이 낫다.

늘 가슴을 맞대고 살아라

사랑하는 사람을 내 주변에 두라는 것은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연인이든 부부든 오랫동안 떨어져 사는 것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한 집에 살면서 각방 쓰는 부부도 있는데 이런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아들이 초등학생이던 시절 아내가 먼 지방에서 일을 하느라 주말부부가 되었던 적이 있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챙기기 등 집안 살림을 고스란히 내가 떠맡았다. 문제는 이런 것보다 부부가 떨어져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진하게 들었다. 퇴근하여 집에 와봐야 낙이 없고, 아내가 일에 치여 집에 못 오면 2주 만에 얼굴 한 번 본다. 오랜만에 보면 좋을 것 같아도 실제로는 서먹해지기까지 한다. 그 이후 절대 이산가족으로 살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특히 ‘기러기 아빠’는 안쓰럽게 보일 때가 많다. 기간이 길어지면 활달했던 성격이 침울해지고, 술잔을 앞에 두고 눈물을 짜고, 건강을 상하는 경우까지 있다. 언제라도 날아갈 수 있는 ‘독수리 아빠’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지만, 1년에 한 번 보는 ‘기러기 아빠’, 그나마 여건이 안 되어 몇 년이 지나도 얼굴 한 번 못 보는 ‘펭귄 아빠’는 절대로 피할 일이다. 자녀는 핏줄만 같을 뿐 남의 나라 국적에다 의식구조까지 현지화되어 사실상 남남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현지인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최악의 경우까지 있다. 이때도 자녀는 거의 대부분 엄마 편을 든다고 한다. “내 인생을 돌려줘!” 해봐야 때는 늦으리. 남자의 갈비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늘 가슴을 맞대고 살아야 진짜 짝꿍이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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