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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밥 먹여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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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4  19: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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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필

필자가 대학의 철학과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고향에 전해지자 “세상에 젊은 놈이 할 일이 없어서 점쟁이 되려고 한다네” 이런 말들을 하면서 웃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내 친구는 명문 사학의 불문과를 가겠다고 했더니 학비를 대는 형님이 정색을 하고 “그런 데 가려면 차라리 고향에 가서 땅이나 파라”고 하더란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만 해도 인문학은 영문과만 제외하고는 대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초·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철학 과목이 없다. 일제 때 철학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제국주의는 식민지에 철학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식민 백성이 명철해지고 매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통치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초등학교 때부터 철학이 필수과목이다. 대학 시절 프랑스 고교 철학 시험 문제를 보았는데, 난이도가 서울대 철학과 수준이어서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기억이 있다. 프랑스가 문화대국을 자임하고 그토록 콧대가 높은 이유를 알만했다.

철학과 첫 수업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철학은 못 하나 박는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그럼 철학은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세상 사물의 기본 이치를 가르쳐주는 것이 철학이다. 나무로 치면 가지와 열매 같이 드러난 부분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보는 시각을 길러준다. 9년 전 필자가 관악구청장이 되어 인문학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자 다음과 같은, 의문인지 불만인지 모를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인문학이 밥 먹여주나요?”

금융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는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나는 철학의 눈으로 금융을 본다”고 대답했다. 실패를 거듭하는 역경 속에서도 미친 듯이 읽었던 철학서들이 돈의 흐름을 보는 안목을 길러주었다는 말이다. 돈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탐구가 돈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이라 할지라도 인문학이 밥벌이가 된다는 것은 이미 대세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서양에는 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 전공자만 뽑는 금융회사도 있다. 인문학은 단시일 내에 습득하기 어려운 반면 금융 실무는 연수 과정에서 가르치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대기업이 인문학 전공자를 뽑아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키우는 융합형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도입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기업 가운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내 교육과정을 인문학 위주로 구성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인간과 기술의 결합이 창의력을 높일 것이라는 가정은 이미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가 증명해냈다. 잡스의 명작 아이폰은 신기술보다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는 상상력의 원천이 인문학이라고 말했다. 게이츠는 “인문학이 없었다면 컴퓨터가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인문학 예찬론자다. 철학이 창의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철학은 기존의 관념과 상식을 깨뜨리는 작업이고, 이런 깨뜨림에서 창의성이 싹튼다.

음악, 미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문·사·철과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문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없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스승의 권유를 받아들여 하버드대 철학과에서 공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베토벤은 괴테의 희곡에 감명 받아 <에그몬트 서곡>을 작곡했다. 그는 그리스·로마신화와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고전을 탐구하면서 이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괴테, 워즈워스, 하이네 등 동시대 문호들과 활발한 교제를 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역사를 모르고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이해할 수 없고, 1937년 스페인 내전과 나치의 침공을 모르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세계적 디자이너 샤넬도 고루한 사교계 인사들을 만나는 대신 에밀 졸라, 앙드레 지드, 장 콕토와 같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성들과 사귀면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었기에 그녀의 디자인은 늘 시대를 앞서갈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성당의 벽화를 그릴 화가 공모에서 떨어진 후 라틴어를 공부하고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은 결과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만능 예술가로 새로 태어났다. 그가 단순히 그림만 열심히 그렸다면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실용학문이 패스트푸드라면 인문학은 숙성된 된장과 같다. 인문학에는 수천 년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다. 무작정 땅을 판다고 금송아지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저기 산재된 금붙이를 끌어 모아서 기술을 더해야 작품이 된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문고전 속에 흩어져 존재하는 지혜의 조각을 모으고 반죽을 하여 자기 삶의 지혜로 만드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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