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때 볼펜장사 시작…2002년 태풍 ‘루사’ 때 처음 기부

토지보상금 전액 난치병 어린이 수술비에 기부하기도

▲강원 산불 이웃돕기 성금 2억원을 기부한 함평출신 이남림(73)씨.

지난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사무실. 한 남성이 “강원 산불 피해 주민들을 돕는 데 써달라”며 손편지와 함께 2억원의 수표가 든 봉투를 맡기고 떠났다. 따뜻한 선행의 주인공은 기부자 이남림(73)씨. 성금을 전달한 사람은 아들 이성준(39)씨였다.

“아버지가 ‘너한텐 얘기해봤자 모른다’고 하실 만큼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하셨대요. 이번에도 집이 없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느냐면서 산불로 집을 잃은 이재민 분들을 돕고 싶어 하셨어요.”

이남림씨는 사실 지난 17년 동안 모두 65억여원의 돈을 사회에 기부한 ‘기부왕’이다. 첫 시작은 2002년 태풍 ‘루사’ 때였다. 40년 전, 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는 목동 판자촌 집이 떠올라 수재의연금 1억원을 내기로 결심했다. “기부를 하시기로 했는데, 막상 1억원이라는 큰돈을 낼 생각을 하니 ‘이걸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3일 밤을 못 주무시고 고민하셨다는 거예요. (웃음)” 아들 성준씨가 말했다.

난생처음 하는 기부에 고민했던 것도 잠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기쁨이 더 컸다. 그렇게 이씨는 ‘기부 중독자’가 됐다. 이듬해 태풍 ‘매미’ 때도 1억원을 쾌척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이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왔다. 너도나도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던 소년 이남림은 남대문시장 좌판에서 볼펜장사를 시작했다.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은 예사였고, 고된 몸을 이끌고 돌아갈 집도 없이 혼자 지냈다.

▲이남림씨가 지난 12일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2억원을 기부하며 쓴 손편지.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제공

생계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번 돈을 알뜰살뜰 모아 남대문에서 안경 도매점을 시작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었다. 장사를 마친 뒤에는 야학에 다니며 먹고살기 위해 포기했던 공부를 이어갔다.

결혼 뒤 2남1녀를 얻은 이씨는 1984년 아픈 딸의 건강을 위해 서울보다 공기가 좋은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로 귀촌했다. 당시 상현리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아궁이에서 밥을 짓던 ‘깡촌’이었다. 그 땅에 ‘신도시’가 세워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귀촌 뒤 전원생활을 위해 상현리와 이의리(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사들였던 땅이 2000년대 중반 ‘광교신도시’ 개발 계획에 포함되면서 이씨는 수십억원의 토지보상금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씨는 갑작스럽게 생긴 보상금은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치병 어린이의 수술비 마련에 기부한 까닭이다. 2006년 1월과 2007년 2월 각각 30억원씩 모두 60억원을 “돈이 없어 병을 못 고치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한국방송>(KBS) ‘사랑의 리퀘스트’에 냈다. 세금 등을 제외하고 남은 보상금 전액이었다. 30억원은 당시 난치병을 앓는 어린이 150여명의 수술비를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씨는 지금껏 자신의 선행으로 도움을 받은 이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냥 도움을 준 거니까 마음만 받으면 된 거지, 굳이 얼굴 보고 인사를 받을 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선행을 남들 앞에서 드러내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아들 성준씨가 말했다.

한때 임대 사업을 하기도 했던 이씨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이 보유했던 부동산을 대부분 처분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을 때 미리 정리를 해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17년 연말엔 3년 동안 들었던 적금 3000만원을 중증 장애인 구강치료비 지원금으로 기부했다.

“자식 입장에서 아버지가 기부하신 돈이 아깝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죠. 저도 그렇게 큰돈을 써본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가 ‘네가 번 돈 아니지 않냐’고 하시는데 맞는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 정말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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