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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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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22  10: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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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한림대 교수

꾸준한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TV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했다. 그가 직접 출연한 것은 아니고 개그맨 문세윤에 의해 호명됐다. 2018년 트렌드였던 ‘소확행’의 어원이 어디에서 출발하였는지 소개하는 과정에서 하루키가 인용됐다. 문세윤은 부러 떠듬떠듬 하루키가 어떤 글에서 처음으로 소확행이란 조어를 사용하였는지 출연진들에게 설명한다. 키득거리는 패널들의 반응을 통해 시청자로 하여금 무장해제를 시도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조어인 소확행은 하루키가 젊은 시절 쓴 수필집에 나오는 짧은 산문의 제목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뜯어 먹을 때 얻는 행복감 같은 확실한 행복은 없다.” 부인할 수 없다. 바쁜 일상 중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의 중요성을 필자 역시 체감하고 있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글을 쓰기 위해 운동을 하고,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는 하루키는 필자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원작으로 알려져 있어 진즉 책을 구했지만, 미루다가 뒤늦게 책을 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버닝’의 몇몇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하루키의 글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와 원작소설은 그 맥락상 분명히 상이한 지점이 있었다. 영화의 종수에 해당하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30대 기혼이고 영화의 벤인 그는 미혼의 20대 후반이다. 소설에서 둘의 관계는 경쟁적이지도 않으며 그녀를 두고 질투의 감정 따윈 사치라는 듯 쿨하다. 원작소설이 소위 ‘달관세대’로 번역되는 잃어버린 20년의 일본 사토리 세대에 대한 메타포라면, 영화는 지금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N포세대의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의 정서가 더해졌다.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를 인용하여 꽉 막힌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려냈다.

‘버닝’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스티브 윤이 역을 맡은 벤이 파스타를 준비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역을 맡은 종수(유아인 분)가 된장국을 먹는 신이다. 솜씨 좋게 칼을 세워 마늘을 다지고 된장국을 익숙하게 끓여 아버지가 남긴 누추한 집에서 종수는 혼자 밥을 먹는다. 반면 호화로운 빌라에서 여유롭게 사람들을 초대하고 제사장처럼 파스타를 요리하는 벤의 모습은 종수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비를 이끌어낸다. 종수의 식사가 생존의 문제라면 벤의 요리는 선택된 자임을 확인하는 의례로 보인다. 일차적으로 생존의 문제가 해결돼야 지위와 명예에 대해 꿈꿔볼 수 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넘을 수 없는 투명한 벽은 그들이 만드는 요리를 통해 표현된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 중 성적인 욕망의 충족보다 더 큰 행복감을 주는 것이 음식을 만족스럽게 먹었을 때라고 한다. 맛있고 훌륭한 음식을 여유롭게 먹는 것만으로도 ‘먹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선다. 연장선상에서 ‘집사부일체’가 기존 먹방과 차별화해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멘토링의 포맷을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다양한 게스트가 초대되고 음식을 즐기며 나누는 대화 중에 일상생활에서 얻은 삶의 지혜와 성찰은 웃음코드와 함께 여운처럼 남겨진다. 그러나 그 웃음의 여운만큼 삶의 치열한 갈등은 쉽게 봉합된다. 만병통치약이다.

소확행은 조작된 트렌드로서 이데올로기이다. 주체적인 소확행의 실천이 아닌 피동적 소비주체로서 소확행 수행자들은 트렌드로서 하루키를 모방하는 필자를 포함해 이미 좀비다.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는가에 답은 ‘버닝’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일본사회에 대해 달관이라는 냉정함을 묘사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소환, 이창동 감독은 우리 사회의 N포세대가 나아가야 방향에 대해 생산적 열정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전자엔 꺼진 난로 앞에 앉아있는 차가운 시선만이 있다면 후자엔 불을 지필 여지가 있어 보인다.

‘버닝’의 마지막 엔딩 씬 전에 종수가 혜미의 빈집에서 글을 쓴다. 따라서 종수가 벤을 죽이고 불태우는 마지막 장면은 종수 자신의 열정을 불살라 만들어 내고 있는 창작의 세계로 읽힐 수 있다. 비로소 종수는 분노의 주체로서 살인자가 아닌 그가 쓰고 있는 창작물의 주인이 된다. 이제 생산자로서 종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준비를 끝냈다. 진짜 자신을 위해 소비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생산의 주체와 소비의 주체가 중첩돼 있을 때에야 소확행은 포스트 신자유주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이념이 될 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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