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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의 흔적을 찾아서...
양수영 기자  |  suyoung@hp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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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21  10: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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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

아침내내 내리던 비가 11시 무렵에 서서히 잦아들더니 그쳤다.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답사를 하려는 마음을 가볍게 한다. 덤으로 햇빛까지 비춰주니 참으로 감사하다. 과연 오늘의 문화답사는 어떤 마음의 기쁨을 전해줄까 궁금해진다.

오늘은 함평읍내의 누구나 지나다니면서 볼 수 있는 이재혁가옥과 함평성당, 함평이씨 시조묘를 중심으로 하려고 한다.

오늘 답사하려는 곳은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항상 생활속에서 역사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라 함평읍민들에게는 복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재혁 가옥(咸平 李載爀 家屋)은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에 있는 건축물이다. 2004년 2월 13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이 머물다 간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은 곳이다. 어떻게 이곳에 김구선생이 왔다가게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이재혁가옥

이재혁가옥은 굳게 자물쇠로 입구 문이 잠겨져 있었다. 아쉬움이 가득하다. 담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이재혁가옥은 함평이씨 이동범(李東範, 1869∼1940)이 20세기 초반에 건립하였다. 이후 아들 이재혁(李載爀, 1893∼1992)이 거주하였는데 정성을 들여 잘 지어진 사랑채로 외부재료나 형식으로 보아 근대적 성격을 띤 주거건축이다. 현재 안채는 없어지고 외부공간인 정원과 더불어 사랑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다. 상량문에 의한 사랑채의 건립 연대는 1917년으로 확인되었다. 외부재료를 근대적 재료인 유리창으로 마감한 것이 흠이지만, 전통 한옥이 근대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 단계의 가옥으로서 학술적인 가치가 있고, “ㄱ”자형 사랑채 건립은 이 지역에서 매우 보기 드문 예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숨어 지냈던 육모정은 1925∼1926년에 현재 국도 23호선(당시 2등도로)이 개설되면서 도로에 편입되었다. 이동범은 도로가 개설되기 1년 전인 1924년에 도로에 편입되는 육모정을 철거 매각하고, 사랑채 옆에 육모정 연못의 돌을 옮겨 새로이 연못를 마련하고 연못 안에 육모정 크기와 똑같은 육각형 몸체에 기와를 얹은 정자를 지어 ‘연정’이라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육모 기단만 남아 있다.

   
구함평성당

한때 백범 김구선생이 낮에는 육모정밑 토굴에서 밤에는 안채 다락방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때 당시로 돌아가 백범 김구선생의 삶과 이 가옥의 주인을 만나본다. 이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리는 함평성당을 향했다. 함평성당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194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북한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1년에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의 지원으로 1952년에 완공되었다. 1952년에 건립된 옛 성당은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성당 건축 흐름의 변곡점에 건립된 건축물로 현대 성당 건축의 시초로 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함평읍교회 순교비

잠깐 함평성당의 역사를 보면 1930년 이계윤과 최말녀 부부가 목포에서 함평으로 이주해 오자 계량(현 노안) 본당의 박재수 신부는 이들을 위해 1931년 판공 때 함평의 기산 회관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후 내교리에 사는 조 마리오 집에서 주일 미사를 가끔 봉헌했다. 이어 1936년경부터는 나주 본당의 헨리 신부와 김재석 신부가 번갈아 와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1940년경부터는 신자들이 나주 본당이나 인근 공소의 미사에 참여했다. 이후 함평 공소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1945년 12월 8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김창현 신부는 1949년 여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해 1950년 5월 상량식을 거행한 뒤 8월 15일에 봉헌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10월에 후퇴하던 공산군이 불을 지르면서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51년 12월에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을 위한 지원을 약속하여 1952년 4월에 개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헨리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현재 함평성당은 새로 성당을 건축하여 신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 함평성당은 1층만 사용되고 있었다.

잠시 이곳에서 천주교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신앙의 터를 세운 믿음의 증인들을 위해 기도해본다.

함평성당을 답사하고 난 후에 잠시 함평읍교회 순교비를 돌아보았다. 신앙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들의 이름과 비석이 교회 입구에 서 있다. 잠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해본다.

   
함평이씨 발원지

우리는 다시 함평이씨 시조묘를 찾아 나섰다. 함평이씨 시조묘는 해보와 무안과 함평으로 이어지는 삼거리 위쪽에 다소곳하나 위엄있게, 화려하진 않으나 다감하게, 고색에 현대식이 가미된 아담한 유택이 자리잡고 있었다.

함평 이씨(咸平 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광종(光宗) 때 신무위 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내고 함풍군(咸豊君)에 봉(封)해진 이언(李彦)이다. '정묘보(丁卯譜)' 세록(世錄)편에 의하면 시조공(始祖公) 이언(李彦)이 함풍군에 봉해져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성향(姓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4세 순지(順之)는 고려조에서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고, 이어 그의 큰아들 림(琳)은 문과에 급제하여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다.

순지(順之)의 둘째 아들 광봉(光逢)은 충숙왕 1년(1314년)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사신 임명을 받고 원(元)나라에 가서 연호를 원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고 왔다. 충숙왕 6년(1319년)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가 되었다가 이듬해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벼슬이 올랐으며, 1324년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충숙왕 초기에는 심양왕(瀋陽王)으로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전지(傳旨)를 보내 나라의 모든 일을 간여하였는데, 이때 그는 상왕인 충선왕을 보좌한다는 권세를 빌려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 최성지(崔誠之) 등과 함께 뇌물을 받고 친척에게 관직을 팔았다.

이 때문에 충숙왕의 미움을 샀다. 충숙왕 8년(1321년) 원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면서 충선왕이 토번(吐蕃)에 유배되자,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충숙왕의 명령으로 먼 섬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섬으로 가지 않고 홍주(현재 충남 홍성) 부근에 머물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 뒤 충숙왕에게 원한을 품고 충숙왕 9년(1322년) 원나라에 있던 고려 사람들과 심왕당(瀋王黨)을 만들어 충숙왕을 폐하고 심양왕 고(暠)를 고려왕으로 앉히기 위해 책략을 꾸몄다. 이를 위해 충숙왕을 폐하기를 청하는 글을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올렸으나 원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324년 삼사사(三司事)의 직을 맡아보았고, 1333년 삼사사벽상삼한삼중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명공신(三司使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佐命功臣)으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함풍 이씨(咸豊 李氏)라고 부르다가 태종 9년(1409년)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두 현을 합하여 함평(咸平)으로 개칭되면서부터는 함평 이씨(咸平 李氏)로 불러오고 있다.

   
함평이씨 시조묘 전경

함평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70명을 배출했으며, 중시조는 시조의 10대손인 종생(從生)이다. 그는 세조 때의 무장으로서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오르고 각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는데 함평이씨의 뛰어난 인물은 그의 후손이다. 문신으로는 선조 때 대사간 효원(效元), 인조 때 형조판서·반정공신 해(盡), 선조 때 충청도관찰사 춘원(春元), 효종 때 대사헌·예조판서 지익(之翼), 인조 때 황해도관찰사 배원(培元) 등이 있다. 무장으로는 통제사·공신 원(沅), 영조 때 훈련대장·병조판서·분무공신(奮武功臣) 삼(森), 정조 때 어영대장·도총관 창운(昌運) 등이 있다.

함평이씨 시조묘는 참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함평이씨 발상지 표지석부터 시작하여 함평이씨 시조 언(彦)묘소까지 또한 다양한 비석들이 서있었다.

자신의 시조를 기억하고 조상의 묘를 가꾸면서 자신의 뿌리를 지켜나가는 함평이씨 문중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또한 함평의 역사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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