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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역사 박물관, 함평공원
양수영 기자  |  suyoung@hp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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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14  11: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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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공원은 늦은 가을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낙엽은 떨어져 뒹굴고 오고 가는 발걸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즈넉하기만 하다.

함평읍 중앙에 위치해 있는 함평공원은 함평읍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여름에는 많은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올라와서 시원한 여름밤을 즐기고 가족들과 함께 놀이를 즐긴다고 한다다.

작은 공원이지만 역사적 발자취가 살아 있는 박물관과 같은 느낌이다. 여러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고 살아 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역사적인 건축물 등이 있다.

우리는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함평천 옆에 자리잡은 2층 누각 영선정을 올라간다. 영선정에 올라 함평천을 바라본다. 옛적에는 물이 풍부하고 이곳이 함평의 살아 있는 젖줄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저만치 왕버들나무의 자취를 화면에 담아 본다. 아마 봄에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올라오면서 연두색 축쳐진 옷자락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기운과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 내는 귀부인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두운 갈색빛을 내며 늦가을의 귀티를 자랑하고 있다. 영선정에서의 풍광은 참으로 일품이다.

함평은 예부터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었고 특히 쌀맛이 좋고 질이 좋아 ‘함평쌀밥만 먹은 사람은 상여도 더 무겁다’라는 속담이 나올정도였다고 한다.

함평에는 기산영수로 불리는 명승지가 있다. 함평읍내 동북방 함평공원의 둔덕과 그 밑 함평천을 일러 중국 하남성 동봉현의 전설적인 땅에 비유하고 기산영수라 했다.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요임금은 BC2367년에 산서성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50년간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요임금때 같은 태평성대에도 세속을 싫어했던 인물이 있었던지 소부와 허유는 세상을 등지고 하남성 기산에 숨어 살았다. 요임금은 단주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그 아들이 어질지 못해 임금자리를 물려줄 사람을 찾던 중 기산에 숨어사는 소부와 허유가 그 자리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요임금은 사람을 기산에 파견했다. 소부가 이 말을 전해 듣자 펄쩍 뛰며 사람을 되돌려 보낸 뒤 기산밑 영수에 귀를 씻었다.

   
 

마침 이때 소에게 물을 먹이려 이 냇에 내려온 허유는 소부가 귀를 씻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연유를 물었다. 소부가 가로되 "나더러 임금자리를 맡으라니 그 소리를 들은 이 귀가 불결하여 씻는다."하므로 허유는 끌고 왔던 소를 소부가 귀씻고 있던 냇가 윗쪽으로 몰고가면서 "나는 미물인 소에게도 소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고 했다고 전해온다. 실제로 이 두 인물이 살았던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에 기산영수 하면 이 두 인물을 관련시켜 생각하는 전설적인 지명으로 생각했으며 바로 그와 꼭 같이 쓰는 지명이 함평에 있는 것이다.

함평공원 부근의 내와 함평읍의 주산을 언제부터 기산영수라 부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곳에 조선 세조때 단종 왕위 찬탈을 못마땅히 여기고 벼슬을 마다하여 이곳에 정각을 짓고 살았던 이안이라는 인물이 지은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고 한다.

우리는 함평천의 풍광을 감상하고 공원을 서서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함평공원 초입에는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문화재자료 제 176호)를 비롯하여, 1977년 재조성 당시 군청 후정에 방치되어 있던 목민관비를 한데 모아 세운 것이 놓여있다. 특히 척화비는 남아있는 척화비들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며 전라남도 내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개화기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목민관비 또한 연도별로 제작되어 있어 함평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한다.

함평 공원 내에는 높이 12m의 특수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나라와 겨레 위한 얼의 탑(塔)'이 준공되어 있다. 이 탑은 신사를 허물은 자리에 6·25 후 1.8m 가량의 충혼탑이 세운 것을 1977년 새로 세운 것이다. 또한, 1907년 이동범이 세운 세심정이 있어 그 당시에도 이 일대를 군민들의 휴식지로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심정 정자에 올라 함평천을 내려다본다. 봄에는 벚꽃 휘날리며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였겠지만 지금 세심정은 조용히 가을을 담은채 묵묵히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영파정 정자를 찾아나선다. 영파정은 세조 1년(1455)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영파정 이안(1414∼?)이 자신의 호를 따 지은 건물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1450∼1460년대로 추정한다.

   
 

그 후 영파정은 함풍 이씨 가문에서 관리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유재란(1597) 중에 불에 타 없어진 후 영수정이란 이름으로 다시 지었으며, 1820∼1821년 사이에 현감 권복과 김상직이 현재와 같은 규모로 지었다.

그 뒤 고종 20년(1883)에 크게 보수하고, 1966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안쪽은 좌우측 1칸만 온돌방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깐 대청으로 설계하였다.

영파정은 예전에는 영수정 관덕정으로 불리면서 냇가 건너에 과녘을 설치하고 활을 쏘는 궁도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영수천 직강공사로 과녘이 멀어지자 궁도장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자체로 보존되고 있는 듯하다. 영파정의 입구문이 열쇠가 채워져 잠겨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영파정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다시 우리는 함평문화원 뒤쪽에 자라고 있는 붉가시나무 군락지를 찾았다.

붉가시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활엽수이다. 이 나무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지망 섬들과 남해안지방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수종으로 내륙지방에서는 함평군 함평읍이 자생지대이다. 마을의 집 뒤에 울타리와 같이 자라고 있으며 과실이 잘 열린다.

목재가 단단하고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이용도가 높은편이며 붉가시나무라는 이름은 그 목재가 붉다고 하는데서 연유하였다. 나무의 나이는 200년 정도로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붉가시나무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함평공원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함평군민들에게 보물같은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접근가능성이 용이하고 공원 자체가 가지는 삶의 쉼터 역할이 가능하며 역사적으로는 영파정을 비롯한 목민관비, 척화비, 충혼비 등의 유적은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적 증거물로서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우리는 함평공원을 돌아보며 값진 보물을 발견한 듯 귀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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