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하얀 리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거장 미하엘 하네케감독의 작품이다. 무대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의 작은 프로테스탄트 마을이다.

마을 아이들이 하나씩 끔찍하게 폭행당한 채 발견되고, 범인을 추리하던 마을 학교의 선생은

무시무시한 공동체의 비밀이 범죄의 뒤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네케감독은 종교적인 규율에 함몰당한 채 살아가는 한 공동체의 무의식이 빚어내는 집단적 폭력을 통해 지금 세계의 파시즘과 테러리즘을 읽어낸다.

인간성 내면의 탐구라는 하네케 감독의 주제의식이 보다 넓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 작품이라고 보여진다.

미학적으로도 <하얀 리본>은 숨이 막힌다. 아름다워서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 미학적인 규율이 너무나도 엄격해서 목이 졸리는 것 같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영화<하얀리본>은 <피아니스트>와 <히든>에서 하네케감독이 구사하던 영상의 쇼크효과는 거의 없다. 오히려 하네케감독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더 무시무시한 걸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영화 <하얀 리본>은 진정 하네케감독의 새로운 차원이라 불릴 만 하다.

고요한 마을에 터진 의문의 사건들... 아이들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1913년,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독일의 한 작은 마을. 마을 의사가 누군가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를 시작으로 방화, 사고사, 실종사건에 심지어 한 아이의 눈이 도려내지는 범인을 알 수 없는 끔찍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해 마을은 공포에 휩싸인다.

한편, 마을의 아이들은 순결한 영혼의 상징인 ‘하얀 리본’으로 복종과 순결을 강요 당하고, 어른들의 보이지 않는 폭력 속에 또래들끼리 더욱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마을에 벌어지는 원인 모를 사건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아이들…… 그리고 이 마을에 부임된 신임 교사는 이 아이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실 영화<하얀리본>은 예습없이 보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긴 어려운 작품이다. 어떻게 저 이쁜 아이와 파시즘...또는 테러리즘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상처입은 새 한마리를 옷속에 품고 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다고 한다. 상처가 나으면 정들지 않고 날려보내 줄 수 있냐고 아버지가 묻는다 그럴거라고 꼬마가 답한다.

이런 순수가 과연 주변 우형무형의 폭력환경들을 거쳐 가면서까지 잘 보존될 수 있을까.

주인공인 마을교사는 영화내내 진실되고 정직해 보이는 의로운 청년이지만 결국은 용기없이 주변환경에 영합, 안정된 생활속 노인네로 늙어 버린다. 파시즘 앞에서 무기력하게 방관자로 남는 소심한 지식인의 전형인 것이다.

영화 속 남작부인은 겉으로 드러난 안정되고 품위있는 생활 속에서 증오와 분노로 야기되는 폭력과 공포의 환경을 뼈 속까지 느끼며 참고 참는다. 그러나 인내의 극점에서 용기있게 항거하며 자신 스스로의 자유의 길을 선택하고 선언한다. 작품 속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용기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등장인물 마을목사는 순수와 바른생활을 강요하는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를 연기한다. 파시즘의 상징 인물이다. 고양이 앞에 쥐인 양 오로지 두려워하면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은 억눌린 정서와 감정들이 무의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동시에 아이들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분노와 폭력성도 같이 쌓여간다.

1913년 독일이 영화속 무대이니, 약 30여년후에 2차대전이 터진다. 그때까지 영화속 아이들이 커서 나치완장을 찬 폭력적인 젊은이가 될 것이다. 박탈과 상실감으로 인해 노골화된 이런류의 폭력성은 아이들의 내재된 폭력성에 비하면 너무나 소극적이고 가련한 형태이다

영화<하얀리본>은 어른들 또는 환경적인 폭력에 대한 아이들끼리의 보호본능과 단결력을 보여주면서 방화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에 대한 범인이 누구인지 영화는 끝날 때까지 전혀 밝혀주지 않는다. 반전도 없다. 애매모호함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자리를 한동안 뜨기 어려운 것은 영화의 몰입도가 너무 높아서 영화에 대한 잔상이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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