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오 행정학박사

지금 우리 사회는 그동안 유지되어 온 농촌지역의 지역공동체마저 무너지고 있다. 산업화·도시화 등 성장 위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빠르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한국에서의 도시화율은 1970년대 40.7%에서 2015년에는 82.5%로 증가하여 세계평균도시화율인 54.0%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국가통계포털, www.kosis.kr). 이러한 현상은 농촌지역의 오랜 전통인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마을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사회조직으로 가장 기본적인 단위였다. 나와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생활공간과 경제활동공간, 여가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마을에서 통합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세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교류의 대부분은 생활공간보다는 경제활동공간과 여가활동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생활공간은 이웃 간의 친밀감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달리하고 있다. ‘서로 협력하고 일체감을 조성하겠다는 합의 아래 함께 살아가면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에 개념도 ‘특정 가치관과 자원을 공유하고 서로 협동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문제는 전통적인 지역공동체가 무너짐으로 인하여 현대사회에 과거의 전통적인 지역공동체 모델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영역의 분화와 과학기술의 발달은 삶의 양식을 변화시켰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도 달라졌다. 전통사회에서의 지역공동체의 구성요소는 공간, 공유, 마을규범이었다. 과거에는 공간과 지리적 접근성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지리적 접근성의 중요도는 낮아졌다. 전통사회에서는 종교생활과 경제활동을 공유하였다. 마을의 ‘당산제’는 공동체의 중요한 행사였으며 ‘품앗이’를 통해 경제활동을 공유하였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를 안다’는 속담은 생활의 공유를 이야기한다. 전통사회에서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구체화한 것은 마을규범이었다. 마을규범을 통해 지역민의 참여와 조화, 교류가 보장되었고 마을의 정체성이 확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인 마을규범으로 향약(鄕約)이 존재하였다. 향약은 당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핵심 가치였다. 지금도 간혹 촌계(村契) 형식으로 운영되는 마을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공동체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3가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혈연 중심의 도덕규범의 원형인 가족공동체, 유교적 가치의 계승·발전을 위한 학문공동체, 지역주민의 결속과 협력을 위한 향촌(鄕村) 중심의 지역공동체가 그것이다. 향촌은 가장 기초적인 가족공동체와 지방관아(官衙) 및 조정(朝廷)을 잇는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실제 경제적 활동 등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이었다. 향촌에는 주민들의 결속을 다지고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이 있었다(김홍주, 2013). 그 원리는 크게 네 가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덕업상권, ②예속상교, ③환난상휼, ④과실상규이다. 이와 같은 향약의 운영 원리를 무너져가는 현대사회의 지역공동체 활로를 찾는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첫째, 덕업상권(德業相勸)은 향촌의 주민들이 서로 힘써서 선(善)을 권하는 것이다. 善은 오륜(五倫: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비롯한 모든 유교적 도덕을 활용하여 향촌구성원들의 자질을 향상시킴으로써 사회의 선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예속상교(禮俗相交)는 향촌구성원들 간의 일상생활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한 규범이다. 경사스러운 일이나 궂은 일이 발생했을 때 상호 협동을 통한 운영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노인, 과부, 고아, 병자 등 사회적 약자들까지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대동(大同)사회를 모색하였다.

셋째, 환난상휼(患難相恤)은 경제적 원리이다. 자연재해나 개인적·가정적으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정신적·물질적으로 돕는 구휼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구성원 간의 정신적 화합과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넷째, 과실상규(過失相規)는 위의 세 덕목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에 관한 것과 개인적 잘못을 규제하는 것으로 자치적 운영원리에 의하여 잘못의 정도에 따라 하, 중, 극의 강제 벌칙을 규정하고 있다. 하벌은 공동체 내 화합과 평화를 저해하는 행동, 중벌은 이웃과 불화 또는 환난상휼을 소홀한 자 등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묻고 있다. 극벌은 행정처벌 대상이 되는 사항으로 관아에 고발되어 처벌을 받거나 마을에서 추방하는 벌로 대표적인 예가 불효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지역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큰 한계는 사업만을 매개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마을을 사업단위로 구획하는 것은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업과 정신을 관통하는 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규범이 필요하다. 지역공동체의 가치와 운영원칙 설정은 주민이 주체가 되어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가치와 규범은 지도자와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고 함께 실천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 전통사회 鄕約의 운영원리를 현대사회의 지역공동체 운동에 적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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