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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인 김해김씨 염소, ‘염소부인’
최권진  |  webmaster@n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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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29  13:4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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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권진 주필

올해 9월 1일자로 통합 함평중학교가 개교한다고 한다. 함평중, 나산중, 학다리중학교가 통합된 중학교다. 또한 함평골프고 이설과 더불어 함평여고, 나산고, 학다리고등학교를 통합한 거점고도 개교를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없어져도, 학교이름은 없어져도 지역인재 양성의 초석인 학교설립과 운영에 헌신하신 분들의 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2015년 나는 오랜 숙제를 했다. 함평중학교 47회 졸업생이기에, 함평농고 29회 졸업생이기에 해야 하는 숙제였다. 무엇보다 함평군민이기에 해야 하는 숙제였다. 숙제는 ‘염소부인’에 관한 것이다. ‘염소부인’은 우리지역에서 많은 기부와 자선을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두 개의 비에 있는 비문기록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 염소부인의 묘와 비가 있다.”고 했다. 우리지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며 ‘염소부인’을 예로 들자 선배가 한 말이다. 그때는 한여름이었고, 더위를 식힌다는 핑계로 맥주를 마시는 자리였다. 내일 당장 가자고 했지만 대숲과 잡목이 우거진 곳에 있으니 늦가을에 가자고 했다. 여름에서 늦가을로 미룬 것이 몇 년이 되었고, 2015년 10월 말에야 그 숙제를 하게 된 것이다.

선배가 내는 길을 따라 묘역에 들어섰다. 묘역에는 대나무가 무성했다. 묘에도 대나무가 몇 주 자라고 있었다. 묘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선배를 거들어서 묘역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보니 ‘염소부인’과 부군의 가묘였다. 함께 재배하고 나서 입비를 보니 정부인김해김씨염소지묘(貞夫人金海金氏廉素之墓)라고 새겨 있었다. 어리둥절해서 부군의 제단석을 보니 가선대부였다. 숙제의 마무리를 위해 3개의 비문에 대한 번역을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이순욱 연구원에게 의뢰했다.

먼저 단기4281년인 1948년 ‘한 고을 인사들이 비를 세워 공경히 기록한’ 함평골프고 체육관 옆에 있는 ‘염소김부인창중학실적비’의 주요 내용이다.

부인은 평소 영광 염소에 살았기 때문에 고을에서 ‘염소부인’이라고 불렀다. 부인은 사궁의 과부로 자녀가 없었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부유함을 이루었다. 부인은 또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관대하여 한 고을의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고는 모은 재산을 모두 함평고을에 기부하여 농중학교 창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마침내 꿈이 이루어져서 온 고을 자녀들이 중학교육에 의탁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께서 한 고을 자녀들에게 베푼 것이 이와 같이 원대하니 그 자녀들이 받은 책무 또한 원대하지 않겠는가? 무릇 이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친애하고 흠모하기를 자기의 부모와 학교의 스승으로 하였다. 당시에 받들던 것이 세상을 다할 때 까지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면 보답한 것이 어느 정도 가까울 것이로다.

다음은 함평공원에 가며오며 보는 도열비 속에 있는 ‘김여사염소시혜불망비’다. 병자년인 1936년 함평면 유지일동이 세운 비로 간추린 구절은 이렇다.

집집마다 살아 있는 부처되시고(千家活佛), 온 군에는 생동하는 넋이시라(一郡生靈).지금은 염소(청렴하고 소박하다)라 일컬어지니(今稱廉素), 남기신 향기로운 그 뜻 영원 하리라(百世遺馨).

마지막으로 경신년인 1980년 손불면 죽장리 장동에 세워진 ‘정부인김해김씨염소지묘’의 묘갈자서다. 본인이 쓴 묘비문의 주요 내용이다.

나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이 네 부류 중의 불쌍한 사람(과부)이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함평군 내에 거주하는 김씨는 본관이 김해로, 이씨에게 시집갔는데 운명이 불행하여 이른 나이에 짝을 잃었다. 또 혈육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겨우 쇠잔한 목숨을 보존하여 육순에 이르렀는데 제사 지낼 친족이나 대(代)를 이을 자식도 없으니 통탄과 한스러움이 더욱 지극하다. 다만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해 보면 또한 혼이 골짜기에 뒹구는 일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묘 자리를 정하고 미리 예물을 갖추어 무덤을 예비하여 놓으니 나중에 이 글을 보는 자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묘비의 예견처럼 그때 나는 슬펐다(後日覽此者 孰不悲感哉). 대와 잡목이 울울창창 가득찬 묘역이 슬펐다. 대가 쭉쭉 다투어 들어선 봉분이 슬펐다.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그 풍경이 떠오르면 나는 슬프다. 염소(廉素), 평생을 청렴하고 소박하게 일구면서 기부와 자선에 앞장선 ‘염소부인’의 얼은 기억되어야 한다. 후인들은 기리고 기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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