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보(平步) 선생을 생각하며

이명재 (평론가, 중앙대 명예교수)

학생 민주항쟁의 날로 각인된 4월 19일은 함평이 낳은 한글 서예대가인 평보 서희환 선생의 기일이기도 하다. 평보 선생은 꽃다운 젊은이들의 순수열정을 불태운 채 스러진 꽃잎처럼 잔인한 이 계절에 이승을 하직했던 것이다. 1995년 4월 19일 밤에 향년 63세를 일기로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병원이 아닌 자택의 빈소에는 각계각층의 조화에 비해서 방문객은 한산했었다. 고인은 떠난 지 이미 스무 해가 넘었지만 그의 예술은 더욱 빛나고 있다. 우리는 결코 평보의 인품과 작품을 통한 가치와 올곧은 예술세계를 잊을 수 없다.

평보 선생의 서예작품은 옛 고전이나 근현대 문인의 글에다 특유의 은은한 서예를 반영해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난과 난향의 그윽함을 완상하는 법을 다룬 <난1> (1990년 작)이며 천지화육의 대자연과 인간이 친화된 삶을 구도적으로 쓴 <푸른 산>(1989년 작)은 시 취향의 산뜻한 내용이다. -푸른산은뭇산거느리고…눈속에벙그르는꽃이여꽃흘려보내온가지마다시절을좇아과실을맺듯밭갈고씨뿌려가꾸시어…어진사랑베품의너그럼모든이룸의근원이거니오로지맑고밝은신념을학처럼나래펴게하소서

 

평생을 교직과 서예로 산 선비

 

이천 서 씨인 서희환 선생은 1934년에 전남 함평군 엄다면 성천리 와촌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촌이지만 평보는 어릴 적부터 글과 책을 벗하며 자랐다. 엄다초등학교와 학다리 중학교를 거쳐서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하였다. 목포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꾸준히 서예에 정진해 왔다. 그러던 중에 그는 예향 진도 태생으로서 한국서예의 대가인 소전(素筌) 손재형 선생을 만나고 사사(師事)하면서 새로운 한글서예에 대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국전 출품작으로 서너 차례 연속 특선된 평보는 드디어 30대 중반이던 1968년에 제17회 국전에서 한글 서예작품으로서는 한국 국전사상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아 정진의 보람을 이루었다. 수상 작품은 이은상의 시 「애국시」를 우아한 한글체로 쓴 것이었다. -“겨레여우리에겐조국이있다내사랑바칠곳은여기뿐…”이렇게 자라서 꽃핀 다음에는 중년 이후 에 꾸준한 변모를 거듭하며 영글고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평보 서희환의 서예미학은 그 스스로 새롭게 개선 확립시키며 꾸준하게 독자적인 발전노력을 계속하였다. 평보는 이전의 궁체나 해서체 단계를 넘었을 뿐 아니라 스승인 소전체도 뛰어넘은 한글행서체를 시도해보였다. 특히 의연한 서예가로서 창의적인 서도의 일가를 이룰 만큼 서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성품은 평보라는 그 자신의 아호 그대로이다.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의 한글 서체 변모와 발전과정에도 드러나 있다.

초기에는 스승인 소전처럼 미적인 전서체 취향의 보기 좋은 글씨를 모방해서 썼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기 이후에는 한글을 주로 하되 이전의 판각본이나 전서 모방성에서 벗어나서 특유한 자기 세계를 열어나갔다. 이전의 촘촘하게 보여주기 위주의 멋스런 글자체 대신에 그 글속에다 호방한 힘과 혼을 불어넣는 한글 글씨체를 창안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런 점은 다음과 같이 평보 자신이 이론화해서 발표한 ‘한글 서예 창조적 연구’에서 새로운 한글글씨의 과업으로 내세운 바가 참고 된다.

처음에는 훈민정음 해례나 석보상절 등의 우리 고전을 뿌리로 삼아서 차차로 현대적으로 개선, 발전시켜 왔다. 또한, 평보는 남다른 품격으로 문향(文香)과 서기(書氣)를 지닌 한글서예 문화를 생활화시켰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본시 서예의 뿌리를 유현한 우리 고전에 둔 채 꽃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러기에 그의 한글 작품에는 한문 중심인 중국의 오랜 서법(書法)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와는 또 다른 우리글의 서예(書藝)적인 향취와 빼어난 기풍이 실려 있다.

그러면서도 평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삶을 추구한 평보는 결코 고고한 이상 속에 파묻히지 않고 실사구시적인 자세로 일반사회에 가까이 대응해 왔다. 그는 예술적인 품격을 지니되 일상적인 삶에서는 건전한 가장답게 생활인으로서의 자세를 함께해 온 것이다. 그는 국공립 기관은 물론 주요 사회단체의 일선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여 왔다. 수차의 국전심사위원, 국전초대작가, 예술의전당 자문위원을 맡고 오래도록 문공자문위원회 현대미술관 운영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서예교과서 심의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대 초부터는 세종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 교육을 통해서 서예의 대중화를 펼쳤다. 교과서 제목이나 저서 및 문예지의 제호도 쓰고 한편 국민교육헌장 원문과 70여종의 탑보문을 전국 여러 곳에 남긴 것이다. 영랑과 용아시비, 충무공 동상문, 자연보호헌장비문, 화엄경,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현액, 명랑대첩 탑명, 영산호 준공기념탑문, 성산별곡, 월인천강지곡 전문, 올림픽회관 건립기, 예술의 전당 찬시, 손재형선생 동상문, 박화성선생 문학의 산실 비문 등.

함평으로 귀향한 서예 대가

 

평보 선생은 평소 사회인들과는 워낙 가려서 사귀며 올곧게 처세했던 인품이었다. 그러면서도 동향 후배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하셨다. 선생 자신으로부터 회갑도 지나고 해서 댁에서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스스로 그만 두었다는 엽서를 받은 뒤 무렵이다. 선배께서 후배와 통화 중에 한 번 차라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후배 두어 명과 더불어 댁을 방문했다. 성동구 능동의 언덕진 곳의 조촐한 2층짜리 문화주택이었다. 선배께서는 댁 서재에서 차를 권하며 예술과 고향이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중에 부자연한 관계가 형성될세라 두려워 결코 도제식(徒弟式) 제자는 한 사람도 키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슴에 꽂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근처 한식당에서 오찬을 함께하고 헤어졌었다. 그런데 그 후 남에게 일체 병세를 알리지 않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한다며 달포 남짓을 물마저 끊고 지내다 돌아가셨음을 사모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분의 발인 전날 또래들 대화에서 들은 바로는 평보는 작품을 주는데 인색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그렇게 많이 쓴 글씨를 모아둔 화선지들을 몇 다발씩 태워 버리면서 정작 작품 선물은 극히 드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마음에 들지 않은 자신의 작품은 되도록 거두어들이는 성미였던 것이다. 세종대 교수 때 방학을 기해서 광주에 내려온 평보는 일주일을 여관에 머무르며 자신의 작품 소장자들을 불러서 전에 써준 작품을 받아들인 대신에 직접 붓과 먹으로 같은 내용을 새 필체로 다시 써서 전했다고 한다.

그런 평보선생은 지필묵을 비롯한 유품들을 고스란히 유족에게 넘긴 채로 귀향의 길을 택하였다. 고인께서는 당신이 그리던 함평 천지 엄다면 성철리 와촌으로 달려가 어릴 때 오르내리며 노닐던 칠성봉 뒷산 자락에 편히 잠들어 있다. 서울 근교의 좋은 유택도 적지 않았을 것을 기어코 고향의 품에 안긴 것이다. 어느덧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이렇다 할 기념비 하나 없이 함평천지를 지킬 따름이다.

 

평보의 한글서예 기념관은

 

우리는 이제 한글의 대표 서예가로서 고향 땅에 잠들어 있는 평보 선생을 일으켜서 제대로 받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요즈음 같은 나비축제나 또는 국향대전 때에 함평천지를 찾는 전국 각지의 탐방객들에게도 알려서 바람직한 교육효과를 거둠이 바람직하다. 이미 함평군립미술관에 조선시대의 귀한 문화재로 소장된 추사기념의 한문서예실과 더불어 대조적으로 연계하는 평보의 한글서예기념관을 명품으로 세운다면 학생들 교육을 비롯해서 국내외 방문객을 위한 함평의 새 명소로 전국에 알려져 각광받으리라고 믿는다.

함평나비축제장 안의 미술관에서 평보의 생가나 묘소가 자리한 엄다면 와촌은 곧바로 3백 미터 안팎으로 연결해서 걷기 좋은 꽃길이 되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평보 한글서예의 다양한 변모과정과 작품의 진수는 10여 권에 이르는 서희환의 서예첩 글씨를 확대 복사해서도 해결 가능하다. 요컨대 타지인의 한문서예 작품만을 마련해 두고 정작 대통령상 수상자인 본고장 출신 한글서예가의 작품을 외면한다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평보 서희환의 한글서예기념관쯤의 건립은 앞으로 당면한 과업이라고 본다. 과거의 한문서예와 현대의 한글서예 작품을 통한 상생과 조화를 이루는 함평천지의 예향메카다운 우리 고장 르네상스 과제로 평보를 새롭게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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