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권진 주필

봄이다. ‘박근혜 없는 봄’이다. 봄이 왔다. ‘박근혜 없는 봄’이 왔다. 촛불의 함성과 염원이 현실화된 봄, 비가 왔다. 봄비다. 봄에 오는 비가 봄비지만 봄비다운 봄비는 청명 무렵 내리는 비다. 단비다. 꿀비다. 약비다. 복비다. 새싹을 돋게 하는 비다. 새순을 움트게 하는 비다. 꽃눈을 뜨게 하는 비다. 꽃을 피게 하는 비다. 씨앗이 싹트게 하는 비다. 희망을 심게 하는 비다. 생명을 잉태하는 비다.

20대부터 해마다 봄비가 오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4월이 오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황무지”다.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헌사를 받고 있지만. 내가 생각해 내는 시는 434행의 시중에서 첫 부분의 4행 또는 7행까지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마른 구근(球根)으로 작은 생명을 키웠으니’까지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지만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우는 달이다. 봄비는 잠든 만물에게는 자장가가 아닌 기상나팔소리다.

봄비는 사람보다도 동물보다도 산천이 먼저 반긴다. 기산이 반기고 영수가 반긴다. 초목이 먼저 반긴다. 고사리가 반기고 진달래가 반긴다. 이렇게 반기는 봄비는 조근조근 내려야 한다. 소곤소곤 내려야 한다. 안듯이, 안기듯이 내리는 것이 맞다. 바람과 더불어 오는 비는 봄비답지 않다. 바람비로 오는 봄비는 꽃의 천적이다. 1년을 기도한 꽃인데, 1년을 공 들인 꽃인데 피면서 낙화는 잔인하다. 처절하다. 벌 나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생을 마감하는 꽃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봄비는 실비로 내려야 한다. 이슬비로 내려야 한다. 보슬비로 내려야 한다. 도둑비로 내리고, 여우비로 내려야 한다.

흡족한 봄비가 내리고 나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산에 간다. 함평초교 뒷산 대화봉이다. 운동 삼아 간다면서 가방을 챙기는 것이 고사리를 꺾으러 가는 모양새다. 이른 고사리가 나는 ‘바탕’을 아내는 알고 있다. 다음날 마당가에서 채반에 누운 고사리가 봄볕에 몸을 맡기고 있다. 점심에는 고사리를 넣은 생조기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봄비가 주는 봄선물이다.

농사에 의탁해서 삶을 꾸리고 생명을 이어온 우리의 선인들은 비에게 많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철에 따라 이름이 달랐다. 봄에는 비가와도 일을 해야 하기에 봄비는 일비다. 여름에는 비가 오면 낮잠 자기 좋기에 여름비는 잠비다. 가을걷이가 끝난지라 떡 해 먹기 좋아서 가을비는 떡비다. 겨울에는 농한기라 술을 마시기 좋아서 겨울비는 술비다. 농사시기에 따라 다른 이름이 있다. 못자리 때에 맞추어 오는 비는 낙종물이다. 모낼 무렵에 오는 비는 목비다. 모를 다 심을 만큼 오는 비는 못비다. 모종하기 좋게 오는 비는 모종비다.

해마다 햇봄이 오면 비를 기다리는 마음에 가만히 읊조리는 시가 있다. 우리고장 함평출신 이수복(1924~1986)시인의 ‘봄비’다. 시인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는데 그 시집 제목도 “봄비”다. 봄비를 보며 ‘봄비’를 낭송해 본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세심정에는 벚꽃이 만발했고 영수천의 왕버들은 푸르러 간다.

봄비는 잠든 자를 깨우는 비다. 누워있는 자를 일어나게 하는 비다. 산을 푸르게 하는 비다. 들을 푸르게 하는 비다. 만물을 변하게 하는 비다. 새롭게 하는 비다. 변하고 새롭게 하는 데는 시기가 중요하다. 자연스러워야 한다. 무르익어야 한다. “주역” 64괘 중 49번째 괘가 택화혁(澤火革), 혁괘다. 고치고 바꾸고 새롭게 하는 괘다. ‘대인이 호랑이로 변한다’(大人虎變)는 말은 구오 효사이며, ‘군자는 표범으로 변하고 소인은 낯만 바꾼다’(君子豹變 小人革面)는 말은 상육효사다.

마음은 따로 두고 얼굴만 바꿔서는 안 된다. 모든 국민이 호랑이로 변하고, 표범으로 변해야 한다. 호랑이와 표범이 털갈이 하듯이 몸도 마음도 변해야 한다. 새롭게 해야 한다. 호랑이가 되고 표범이 되어야 개명을 할 수 있다. 개혁을 할 수 있다. 혁신할 수 있다. 혁명을 할 수 있다. 19대 대통령 선거 ‘신록대선’을 한 달여 앞둔 대한민국 국민에게 드리는 4월의 전언이다. 봄비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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