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밖에서는 새로운 트럼프의 보호 무역주의 발상으로 한국의 경제(FTA)와 방위비 부담에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된다. 또한 안에서는 정치불안과 불신으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손실은 물론 법과 도덕 질서에 타격을 주고 있다. 여기에는 돈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적 인식의 책임도 있다.
젊은이들이 취업도 어렵다는 이시기에 특권증의 권력을 이용하거나 남용하여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다가 결국 치부를 드러내는 졸부들의 뉴스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세월 모든 지역을 돌아봐도 독재와 봉건제도의 부패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신음소리를 뒤로하고 호의호식하는 모리배들의 참상들로 인류의 발자취가 고르지 못한채 명암이 엇갈리며 현대에 이르렀다. 아울러 우리 한민족도 3국시대이후 조선의 쇄국정치와 일제의 탄압 및 강대국들의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분단된 조국은 역사의 숙제로 남아 있다. 또한 남북 전쟁의 피바다와 질병과 가난으로 허우적거리며 지난 세월을 보냈다. 근대에 이르러 산업의 발달로 경쟁이 심화되고 지역 이기주의와 정당간에 권력다툼의 심화로 사회적 불신과 평화가 깨지는 현실이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국가지도자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바 지혜롭고 분별력있게 행동하지 못하면 국민의 지탄을 받게 마련이다. 누구라도 돈과 명예에 집착하며 헛된 욕구에 빠져 공허해지는 모순을 낳는다. 한편 가정을 운전하는 부모도 대리만족을 위해 자녀에게 과분한 유산을 남김은 실패의 경험을 통한 책임감․도전심․창의력을 빼앗는 것이다.
강한 훈련이 강한 선수를 만들고 조각가의 칼날의 아픔이 걸작품이 되듯 ,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별빛은 반짝인다. 그러나 인생은 본성적으로 고난(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림자처럼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고난 극복에 방안은 무엇일까? 미국에 사회사업가 헬렌켈러는 88세까지 살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고난속에서도 “나는 평생 하루라도 행복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고난은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불행과 행복을 맛본다. 심리학에서 ‘충격편향’이란 말이 있다.
고난이나 고통은 미리 걱정하는 것 보다는 막상 당하면 적응력이 생기는 현상이다. 고난속에서도 다른 소소한 기쁜 소식으로 고난의 부담을 던다. 또한 고난을 합리화하거나 핑계를 대며 충격을 완화시켜 방어한다. 고난은 심각하게 볼수록 (부정적) 더 감애(甘愛)하거나 승화(昇華)시키는 시각으로 훈련의 필요를 느낀다. 나는 1951년 6.25전쟁 피난시절 영양실조를 당했으며, 지금도 수차례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고난을 겪고 있다. 그러나 고난으로 겸손과 인내와 살고 있음에 감사를 배운다. 또한 이웃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공감하며 이해를 돕는다. 노인으로 여기저기 질병이 생기며 죽음이 가깝다 생각하니 돈이나 명예보다 건강, 예술․․․문학․종교(신앙)에 더욱 가치를 부여하여 감성적인 변화를 느낀다. 벌써 함평에 온지도 15년이나 되어 무엇인가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쓰지만 남에게 인정 받으려는(열등감을 보상 보상 받으려는) 과시적인 동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원치않는 죽음이 당장 왔다면 세상에 아무런 미련과 후회없이 헬렌켈러처럼 즐겁고 기쁘게 수용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죽음도 삶의 일부(씨앗)이며 다음의 천국의 소망(열매)이 있기에 수용해야 하는 의미가 있다. 아울러 삶속에서 날 성숙시키기 위해 훈련시킨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내일 또 다시 뜰 태양을 기대하며 손불 들녘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