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권진주필

다짐하고 다짐했다.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다리심 있을 때 한 바퀴 돌자.’ 나이 쉰 줄에 들어서면서 해마다 하는 다짐이 ‘함평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아직 이루지 못해 올해도 변함없는 다짐이다. 내 몸은 날마다 길을 떠나고 싶은데 마음이 잡는다. 함평에서 태어나서, 함평에서 살아가면서, 함평에서 늙어가면서 함평의 곳곳을 가보지 못했다. 겨우 한다는 것이 불갑산, 군유산, 고산봉, 곤봉산 등반이다. 사포길, 주포길, 산안길 드라이브다. 이렇게 해서는 함평 바로 알기, 내 고장 속속 알기는 요원하다. 길 하나 내고, 길 하나 가꾸는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걷고 싶은 내 몸과 핑계를 대는 내 마음의 다툼은 늘 진행형이다. 걷는 길마다 스토리가 있었으면 한다. 스토리가 있는 길을 걷고 싶다.

함평에는 함평만을 낀 해변이 있고 영산강 본류의 강변이 있어서, 스토리가 있는 해변길과 강변길을 만들 수 있다. 바다는 강물을 가리지 않고, 강은 냇물을 가리지 않는다. 함평의 해변은 함평읍 석성리 성덕에서 손불면 학산리 복학에 이르는 20.6㎞이며, 함평의 강변은 학교면 석정리에서 엄다면 영흥리에 이르는 8.5㎞이다. 해변길 오십리, 강변길 이십리다. 몇 개의 스토리라도 넉넉한 구간이다.

함평에는 부잣집 볏가리 같은 많은 산이 있다. 산은 한 삽의 흙마저도 쌓고 쌓아서 산이 되었다. 땔감이 귀했던 시절, 저 산의 몇 그루 소나무만이라도 우리 것이었으면 했던 산이다. 감악산, 곤봉산, 기산, 수산봉, 남단산, 광대산, 군유산, 발봉산, 백운산, 군장산, 사모산, 속금산, 응암산, 한문산, 고산봉, 금성산, 대봉산, 철성산, 구절봉, 국사봉, 어수산, 옥녀봉, 천주봉, 모악산, 불갑산, 수양산, 승두봉, 월양산, 석화산, 월악산, 칠봉산. 뻐꾹뻐꾹 뻐꾹새 노래에 봄이 익어간다. 산마다 스토리가 있다.

함평에는 어머니 품 같은 많은 들이 있다. 들은 대를 이은 사람들의 땀방울을 모아서 들이 되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을 보면, 저 들의 몇 뙈기라도 우리 논이었으면 했던 들이다. 대덕들, 성남들, 만흥들, 장교들, 궁산들, 산남들, 월암들, 계천들, 진례들, 월산들, 월호들, 죽마들, 엄다들, 성산들, 용성들, 향교들, 평들, 사산들, 금덕들, 주현들, 용암들, 한새들. 찰랑찰랑 논물 드는 소리 들린다. 들마다 스토리가 있다.

길은 길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곳을 오가다 보니 길이 난 것이다. 길이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땅은 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생각하는 길은 전통적인 길의 목적과는 거리가 있다. 통행이 주목적이 아닌 함평 땅의 역사와 함평인의 삶 속에서, 함평 그곳만의 스토리를 키워드로 한 길을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다. 치유의 길. 희망의 길. 사색의 길. 나눔의 길. 대화의 길. 변화의 길. 이런 길들을 생각한다. 길마다 스토리텔링을 해서 주제와 스토리가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길은 같은 길을 동행해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아는 만큼 느낀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들린다. 그러나 길은 무엇보다 계절에 민감하다. 철따라 길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철 아름다운 길은 드물다. 봄에 가고 싶은 길, 여름에 가고 싶은 길, 가을에 가고 싶은 길, 겨울에 가고 싶은 길. 계절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이 도보길이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습성을 드러내는 것이 걷기다. 사람들의 이동수단이 차량으로 대중화 된 이 시대,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땅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배려다. 존중이다. 그래서 땅은 사람에게 지기를 준다. 걷다보면 막힌 생각이 뚫린다. 장단지에 근육이 생긴다. 핏줄에 우렁우렁 푸른피가 돈다. 마음이 비워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다시 채워진다.

수재 박봉혁(朴奉赫, 1873~1935)이 쓴 <영언전>에는 여러 노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성가'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콘텐츠로 활용이 가능한 원형 콘텐츠라고 생각된다. 기성(箕城)은 함평의 별칭이다. ‘기성가’는 일제강점기 지금의 나산면 삼축리 동축에서 후진양성과 저술활동에 매진하던 저자가 함평을 기행하면서 마을의 역사와 문물, 경관을 노래한 가사다. 여기에 등장하는 마을과 인물, 자연경관, 문화유산에다 상세한 주석만 더해도 당시를 되짚어 보면서 함평의 역사문화를 배울 수 있는 전형적인 텍스트다. 그렇기에 ‘기성가’를 근간으로 하여 요즘 유행하는 길 코스, 체험관광코스, 문화유적답사 코스 등을 다양하게 개발 할 수도 있다. 수재(守齋)가 걷던 길을 따라 일명 ‘수재길’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그 자체가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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