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 살수차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씨가 317일간의 사투 끝에 결국 사망했다. 그 동안 언론을 통해 물대포 운영지침을 지키지 않은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었고 당시 책임자인 강신명 경찰청장 등 7명에 대해 백씨 가족이 살인미수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검찰 수사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날아온 비보였다.

그런데 백씨가 사망하자 경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가족들과 대책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신부검을 위한 영장을 청구했고 서울중앙지법은 진료기록 확보를 위한 압수수색 영장만 발부하고 시신부검 영장에 대해서는 “부검의 필요성과 정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법원은 백씨의 사망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진료기록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으로부터 시신부검 영장이 기각당하자 경찰은 영장을 재청구하기에 이른다. 경찰이 들고나온 근거는 서울대병원의 사망진단서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백 농민이 애초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두피 밑으로 출혈(지주막하 출혈)이 있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어제 주치의는 신부전으로 인한 심장정지로 병사했다고 밝혔다. 사인이 불명확해 부검을 통해서 사인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의 부검 시도 자체가 무리수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시신부검에 대해 이미 유족이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고 의료분야 전문가들도 사건 당일부터 그동안의 진료기록만으로도 사인규명이 충분하며 오랜 병원생활 이후의 사망인 만큼 부검이 오히려 사인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견들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는 “엉터리 사망진단서에도 급성 신부전의 원인으로 외상에 의한 뇌출혈(급성 경막하출혈)로 기재돼 있다”며 “(신부전은) 오랫동안 병원생활 하시면서 질병을 얻게 되셨는데 그걸 사인으로 쓸 수가 있냐”며 “외상에 의해 사망했다는 게 명확함에도 부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건 의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시신에 대한 경찰의 부검시도를 고인의 사인에 대한 물타기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경찰의 꼼수로 보고 있다. 또 이를 보도하는 주류언론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이 서 있다.

지난 10개월 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검찰과 경찰이 갑자기 ‘사인 규명을 위해 부검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상당수 주류언론이 정부책임이나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부검공방’에 방점을 찍어 보도하는 것도 전형적인 물타기라는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대부분의 주류 미디어는 이번 사건에 지면과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

26일 장례식장 앞 기자회견에서 고인의 큰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조용히 추모할 시간을 가질 틈도 없이 이렇게 기자회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굉장히 한탄스럽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병원 주변에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경찰의 방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의 강제 부검시도를 막기 위해 장례식장 인근에서 밤을 새웠다던 한 시민은 “한 사람의 생명이 꺼졌는데 슬퍼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다”고 한탄했다.

지난해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백씨가 쓰러진 날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05년 11월 15일, 그날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농민대회 과정에서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유가족과 국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민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꼭 닮았지만 정부의 대응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당시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라 참모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검토할 부분은 있지만 공권력 행사는 엄중한 문제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는 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제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너무도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안티고네 비극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비극이 모두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충분치 않아 벌어지는 비극이듯, 4.19혁명도 그리고 6월항쟁도 모두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모욕, 살아남은 자들에게 슬퍼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던 빗나간 애도에서 비롯됐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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