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건설업 진출해 성공, 언제나 열린 자세로 인생공부

귀흥장학재단 설립, 매해 손불초졸업생들에게 장학금 수여

올해 함평군민의 날, 함평군번영회에 장학금 1천만원 기탁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거대 담론보다도 사회에서의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우리사회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인데 그래서인지 선거철만 되면 부쩍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곤 한다.

경제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사회적 제도보완이 뒤따라야겠지만 그에 앞서 국민의 의식변화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지도층에서 부와 권력과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한다는 의식,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기업의 사회환원에 대한 관심도 늘어가고 있지만 사실 기업가가 사회환원을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함평출신 기업인 중에는 동건종합건설 이흥재 대표가 대표적인 사회환원 기업인이다.

옛날과 달리 요즘 세상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가정형편이 어려운 집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어려운 경제상황에 내몰린 서민들이 자녀들의 등록금을 감당하기도 매우 버거운 현실이다. 정부에서 약속했던 반값등록금도 이제는 조용하다. 아르바이트로 돈 벌어서 학교 다닌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손불면 출신의 이흥재 대표는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 고향의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학비부담을 덜어주고 학업을 장려하고자 하는 뜻으로 4년 전 귀흥장학재단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돈 없어 학교공부를 못했던 설움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대표가 젖먹이였던 한국전쟁 때 사범대 출신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돌아가시게 되고 얼마 후 어머니마저 재가하는 바람에 이 대표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숙부 밑에서 자라게 된다.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 없이 쓸쓸한 유년을 보내던 그는 전쟁 직후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손불초 졸업을 끝으로 학업을 일찍 마감하게 된다.

학업 중단 후 이 대표는 일찌감치 농업에 종사해 열심히 일을 했지만 산업화를 통한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던 군사정부 시절, 대한민국 농업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고 그때부터 농민회에 가담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청년기인 70년대에 카톨릭농민회에 소속돼 서경원 전의원 등과 인연을 맺게 된 그는 80년대에 들어서는 기독교농민회에서 그 활동을 이어갔다.

 

70~80년대 그렇게 농업에 청춘을 바쳤지만 집안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불혹의 나이가 됐지만 무언가 인생의 변화가 필요했다. 손불에서 주로 특수작물 농사를 지었던 이 대표는 평소에도 농민신문과 한겨레신문을 빠짐없이 볼 정도로 정보에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연초에 한겨레신문에서 우연히 기업공개를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잘 나간다는 재벌들의 부채비율이 평균적으로 500~700% 이르렀다. 사업이란 게 자기 돈이 없어도 신용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즈음 대전에 살고 있던 친구가 이 대표를 초대해 대전에 올라가게 됐는데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대전으로 올라가 건설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결심에는 못 배운 게 한이 돼 자녀들 만큼은 도시에서 교육을 시키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

평생 농사만 짓던 사람이 40대 초반이 되어 가족을 데리고 타지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겠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특히 죽장교회 담임목사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대표에게는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자신감도 있었다.

대전으로 이사 후 경험도 없는 건설업에 자신감만 가지고 무작정 뛰어들었기에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라서 기초지식도 부족했거니와 또 공사현장에서 통용되는 낯선 일본용어들 때문에 처음에는 현장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해 실수도 잦았다.

이때부터 주경야독을 통해 낮에는 현장에서 인부들과 함께 일하고 밤에는 설계도면과 시방서 공부를 병행했다. 사업을 하면서 몇 차례 고난도 있었지만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단독주택공사로 시작한 사업은 건설경기 붐을 타고 탄탄하게 성장해갔고 공공임대아파트 공사로까지 규모가 커져 현재는 시행사 2곳과 시공사 1곳을 운영 중에 있다.

이 대표는 다른 분야에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건설업 한길에만 전문적으로 매진해 이제 대전광역시에서도 대표적인 건설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러한 전문성이 인정돼 작년 10월부터 올 4월까지 약 6개월간 대전광역시의 도시주택 분야 명예시장에 위촉돼 정무를 보게 되었다. 이는 대전광역시청이 마련한 전문분야별 명예시장제도로, 명예시장이라고 해서 이름만 있는 시장이 아니라 실제 간부회의에 참여해서 국장보고도 받고 결재의견을 내는 실무적인 행정참여 제도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도시주택분야 명예시장을 하면서 이 대표가 공부하고 깨우친 것도 많다. 특히 전에는 시청에 민원을 보러 가면 행정에 대한 여러 불만이 많았는데 명예시장을 하면서는 공무원들의 입장에 서다보니 그들의 고충도 알게 된 것이 인생 공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명예시장 활동기간이 끝난 후 신문에 기고문을 써서 공무원들을 칭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고향산천을 떠난 지 스물여섯 해가 됐지만 이 대표는 한 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대전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는 고향마을에 있는 친구들 몇을 이끌어서 그들도 모두 성공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도 주기도 했다.

고향에 보다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 고민하던 이 대표는 환갑이 지나고 나서 인생을 어떻게 마감하느냐는 생각에 4년 전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선친인 고(故) 이귀만 선생의 이름 앞 글자와 이흥재 대표 본인의 이름 앞 글자를 각각 합쳐서 ‘귀흥장학재단’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 대표가 젖먹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무친 그리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목포사범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꿈이었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세파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선친의 이름을 담아 부자의 이름이 함께 들어간 장학재단은 전국에 처음이라고 한다.

3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만든 귀흥장단재단은 해마다 손불초 졸업생 전원에게 50만원씩의 장학금을 수여해 오고 있다. 올해는 특히 이흥재 대표가 함평군번영회(회장 김성모)에 특별장학금 1천만원을 기탁해와 지난 6일 있었던 제38회 ‘함평군민의 날’ 행사에 맞춰 9개 읍면 출신 대학생들에게 각각 장학금 100만원씩 수여되기도 했다.

이 대표에게는 한 평생 지녀온 철학이 있다. 그것은 ‘사회에 부를 환원하고 가난하게 삶을 마감하자’는 것. 그래서 이 대표 부부는 신체기증각서도 작성해 제출해두었다.

“사람이 여유가 있으면 땅에 나무를 심고, 사람을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못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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