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예술기획 박동국 대표

지난 달 24일과 25일, 용산아트홀 대극장 ‘미르’에서 동국예술기획 창립 27주년 기념 제90회 ‘한국의 명인 명무전’이 열렸다. 민족의 한과 설움을 춤으로 승화한 한무(恨舞) 열여덟 작품을 선보인 이번 무대를 총감독하고 해설을 맡아 진행한 동국예술기획 박동국 대표.

박동국 대표는 ‘전통문화계의 홀로 아리랑’이라 불리우며 서양문화에 밀려 대중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는 전통의 춤꾼 및 소리꾼을 위한 무대를 27년째 기획해오고 있는 진정한 전통문화예술가이다. 함평군 대동면 아차동 마을에서 태어난 박 대표는 대동향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덕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양대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가족들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뜻을 바꿔 추계예술대학 국악과를 진학하여 대금을 전공한다. 박 대표는 고(故)춘전 성우향 선생께 판소리를, 고(故) 소림 서용석 선생께는 대금산조를 교육받고, 김정수 교수에게 대금을, 권혁태 선생에게는 가야금을 사사받았다.

박 대표는 7살 무렵 함평 우시장에서 유랑극단의 창극을 우연히 접하면서 전통의 소리와 몸짓에 눈을 떴다. 장구와 대금 그리고 아쟁으로 내던 효과음악이 어찌나 놀랍고 신기했던지 그는 창극에 완전히 매료됐다.

©3월 24일 공연한 명인들과의 기념촬영

그러나 초등학교 때 중이염을 앓게 되어 자신의 꿈을 접으려고도 했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꿈과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89년 국내 유일의 국악 전문기획사 ‘동국예술기획’을 설립하게 된 그는 ‘한국의 명인명무전’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게 된다. 출연자 섭외는 물론이고 포스터 제작, 홍보까지 모두 혼자서 해결하는 1인 기획사였지만 신명이 나서 하는 일이라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준비한 첫 공연. 국립국악원 역사 이래 처음으로 관객들이 줄을 서서 공연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문화예술계의 극찬이 이어졌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러나 성황리에 끝낸 첫 공연 이후에도 그는 줄곧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좌석이 만석이 들어차더라도 표를 팔아 남긴 돈으로 출연료와 대관료를 비롯한 부대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전통문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미미한 탓에 연이은 공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줄 단체도 사람도 쉽게 따라붙지 못했다. “유명스타나 외국 스타들의 공연에는 수천 만 원, 수억 원씩 쏟아 붓는 기업들이 우리 공연에는 단돈 100만원 내놓는 것도 아까워합니다. 수년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재정적인 지원은커녕 후원명칭 사용하는 것도 거절당했지만 지금은 후원 명칭과 장관님 축사를 받습니다.”

스폰서 하나 붙지 않는 공연을 강행하면서 재산은 바닥이 나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00만원을 빌렸다가 제때 갚지 못해 900만원을 돌려줘야 했던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94년 한ㆍ중ㆍ일 명인명무전 공연 때는 기업들이 후원하기로 했던 1억원을 거절하는 바람에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아야 했다. 전통문화를 팔아 국제적인 사기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공연을 강행했다.

©3월 25일 공연후 기념촬영. 용산구 문화원장 박삼규(뒷줄 왼쪽) 박동국대표 용산구청장 성장현(중앙) 용산구의회 행정위원장 윤성국(맨 오른쪽)

사재를 털고 빚을 감당하면서까지 공연을 이어갔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법대를 뛰쳐나와 추계예술대 국악과에 몸을 담은 그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섭외를 위해 뛰어다녔지만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같은 무대가 한 해 두 해 이어지면서 차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의 진정성과 고군분투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고(故)박동진 고(故)이매방선생 같은 원로들도 선뜻 섭외에 응할 만큼 공연의 가치는 점점 높아졌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1990년 첫 회를 시작으로 27년 동안 전통이 소홀하게 대접받는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 춤을 꾸준히 공연하며 우리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수차례의 위기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박 대표의 집념과 고집의 결과물이었다.

한국의 명인명무전 90회를 이어오는 동안 조선시대의 마지막 무동 명무 김천홍 선생을 비롯하여 한 시대의 전통예술을 대표하는 판소리 명창 박동진, 명무 김계화, 일인 창무극 공옥진, 명무 이매방, 배뱅이굿 이은관, 여창가곡 김월하, 가야금병창 박귀희 선생 등 전통예술분야의 명인들이 무대 위에서 사라져갔다.

이 외에도 1500여 명의 전통예술인들이 무대 위에서 예술혼을 불사르며 인간의 정서를 녹여낸 130여 개의 춤사위와 소리를 선보였던 ‘명인명무전’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와 해외무대(일본, 중국, 미국) 등 70여 곳에서 공연 돼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데 앞장섰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 연출기획과 조흥은행 창립 99주년, 일본 오사카 민단 50주년, 광주 MBC창사 30주년, KBC 광주방송 창사 개국 판소리 다섯마당, SBS 사극 서동요 음악연출 등 국악을 알릴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달려가 무대를 기획했다.

특히 99년 광주에서 한국 최초로 광주전남 남도전통예술인 추모제로, 국창 송홍록, 박유전, 임방울, 김창조 등 국내 명인명무 117명 위패봉안과 더불어 씻김굿과 판소리, 구례향제줄풍류, 창작국악실내악, 사물놀이, 한국무용 등을 연출기획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악인 개인별로 추모제 행사가 있어왔지만 국악계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합동추모제가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민간 기획사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인정받아 2014년 3월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제2회 대한민국 기록문화대상 리더십 수상과 2015년 9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물대상을 수상했다.

박동국 대표는 “임방울 선생의 판소리 ‘쑥대머리’는 우리나라 최

©심향무 윤송미

초의 전통한류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대중문화의 한류바람보다 임방울 선생의 쑥대머리가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한국 중국 대만 일본에서 LP판 200만장이나 판매 기록을 모르고 있지요.”

“뮤지컬 명성왕후와 같은 우리문화예술과 아이티를 접목하여 자국의 전통문화예술을 후원해야 자국의 문화가 삽니다. 문화융성국가라는 말만 하지 말고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전통문화의 맥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전통문화예술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담당하고 싶습니다.”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박 대표는 3년 후 30주년에 맞춰 한국의 명인명무전 100회 서울공연을 계획하고 있으며 101회 공연은 특별히 링컨센타와 UN본부, La웰셔이벨극장에서 “한국의 명인명무전” 공연을 열 계획이다.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주제로 국악창작공연을 고향에서 열고 싶다는 생각을 밝힌 박동국 대표는 기회가 된다면 함평나비축제 개막식의 연출기획을 담당하여 함평나비축제가 세계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하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박동국 대표는 마지막으로 우리문화예술로 전 세계를 통일시키며 우리나라 창극(여성국극)을 발전시키고 싶다고 굳은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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