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지역 농촌문화운동에 헌신, 50여년간 사진과 향토자료 수집

 

역사는 역사해석 이전에 사료와의 투쟁이다. 역사의 토대는 기록과 증언인데, 현대사회에서 문서자료 이상으로 이미지자료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진은 그 자체 시대와 장소에 대해 증언을 하는 강력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을 수집한다는 것은 역사를 수집하는 일과 같다.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현대사회에서 개인 수집가는 곧 역사가와 같다고 말했다. 정정조 함평문화원 이사는 그러한 수집가의 책무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왔다. 60년대부터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던 정 이사는 현재까지 50여년 이상 사진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해온 향토 수집가다.

1959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 정정조는 농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사정상 가지 못했고 게다가 졸업년도 여름에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설상가상 보통고시마저 떨어지는 바람에 집안농사를 본인이 도맡아 지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4H 삼정구락부 활동을 하게 되고 농촌지도소의 전신인 농사교도소를 찾아가 거기서 정식으로 농업기술을 배우게 된다.

많은 독서로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던 정 이사는 청년시절부터 중국 현대철학자 임어당의 사상 등에 영향을 받아 농촌 계몽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책을 좋아해 하루에도 책 한 권을 뚝딱 읽곤 했던 청년 정정조는 <횃불독서회>를 조직해 중고등학생들에게 독서습관이 들도록 최소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어 오게 만들었다. 학생들이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언제 책을 읽느냐는 마을주민들의 핀잔도 있었지만 독서의 중요성을 알기에 독서회를 계속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정조 이사는 당시로서는 큰돈이라 할 5만원을 들고 목포에 있는 도서도매점에 가서 필요한 책들을 저렴하게 구입해오는 등 백방으로 노력해 대략 500여권의 양서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책장을 구입할 돈이 없었던 정 이사는 당시 이택헌 초대 함평문화원장 찾아가서 직접 책장을 구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독서회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독서지도를 하면서 당시 높았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4H 삼정야학을 만들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일을 했다. 그때 야학에서는 남폿불 아래서 남녀 구분 없이 공부를 했는데 마을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유교전통이 강했던 시절이라 주민들 사이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인데 덕석말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60년대 후반부터는 <마을문고> 활동도 펼쳤다.

 

정 이사는 61년에 병역 신체검사를 받지만 당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실질적 가장의 입장이어서 군대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 병무청 자료와 면사무소 자료가 일치하지 않아 뒤늦게 군사훈련을 받게 되지만 병역기피 의혹으로 여러 피해로 보게 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20대 초반에 몸이 병약해진 정 이사는 죽고 싶다는 심정이 들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지만 28세에 결혼하고는 다소 안정을 되찾아간다.

소명처럼 삼았던 4H 활동과 농사개량회 활동 등이 그에게 남은 인생을 살아갈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 생긴 취미가 사진을 찍거나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당시 사범학교 미술교사였던 정창균 씨가 농사교도소에 자원지도자로 오면서 인연이 돼 생긴 취미였다. 정창균 씨는 당시 무척 고가였던 카메라를 개인소유하고 있었고 암실을 만들어 사진을 직접 현상하기도 했다.

카메라를 살 여유가 없었던 정 이사는 정창균 씨로부터 카메라를 빌려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렇게 해서 정 이사는 60년대부터 여러 풍경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칼라사진도 찍고 인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이 언젠가는 소중한 추억이 되고 또 귀중한 자료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때부터 사진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0년대 들어서는 우표수집까지 시작하게 된다.

그때 시작된 수집벽이 수십 년 계속되면서 집안은 여러 잡동사니들로 가득 찼고 넘쳐나는 물건들은 창고에 넣어두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다. 그때 삼정마을에 수도공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침수사고가 발생하면서 정 이사의 창고를 덮쳐 수십 년에 거쳐 수집한 사진이며 문서며, 무수한 향토자료들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돼 버리는 사고가 일어난다. 새집을 짓기 위해 임시로 창고에 넣어두었던 것으로, 평생의 시간이 담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거대한 폐지더미로 변한 자료들은 애처로운 마음에 처리하지 못한 듯 아직도 그대로 있다.

지금은 방에서 보관해오던 사진들과 우표, 자료들만 일부 남아 있는 상황이다. 만일 ‘향토자료 아카이브’가 있어 거기서 자료를 보관하고 관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자료의 파손에 대해 누구보다도 안타까움이 큰 정 이사는 “만일 향토자료 아카이브가 생기다면, 보관하고 있는 남은 자료를 기증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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