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회의 일정에 따라 한 달에 한두 번쯤 산행을 하다가, 봄기운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동네 뒷산을 나 혼자 호젓이 걷자니 감회가 새롭다. 잔시랫등, 굴바우등, 도장굴, 동아실, 비자나무골, 산탯골, 논골재, 절골재, 광령재, 모가재, 문턱재, 부처바우, 망바우, 기차바우……. 동네를 둘러싼 산과 관계되는, 모두가 그리운 이름이다. 내게는 ‘산’하면 줄줄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어린 시절, 산과 우리들은 친했다. 산은 놀이터였다. 산은 구멍가게이고 마트였다. 산에 가야 주전부리가 있었다. 땅 속에서 뿌리를 캤다. 어린 새순을 잘랐다. 나무에서 열매를 땄다. 눈이 오면 토끼몰이를 갔다. 토끼를 잡는 날도 있었지만, 토끼몰이 자체가 놀이였다. 산에서 소먹이인 꼴을 베었다. 팽이 깎을 나무도 베었다. 돌이켜 보니 산에서 온갖 수탈과 약탈, 강탈을 자행했구나. 산에게 행한 온갖 만행(?)으로, 1960년대 어린 시절을 건널 수 있었구나. 이 산, 저 산에게 많이도 갑질을 했구나.

우리 마을에는 앞산, 뒷산이 있다. 다른 마을도 대동소이 할 것이다. 아무리 조그마한 산도 이름을 만들어 불러 주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산의 이름을 불러주자. 앞산, 뒷산이 아닌 산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자. 옛 사람들은 산도 격을 따져서 산과 봉을 붙이고, 재, 령, 치를 붙여 주었다. 산은 산다운 품격이 갖춰져야 ‘산’이라고 했다. 산다운 품격이 다 갖춰지지 않으면 ‘봉’이라고 했다.

외국의 산들, 등반대들이 등정에 성공했다는 히말라야산맥의 여러 산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즐거이 호명하지 않는다. 그런 거대한 산은 거기 있으면 된다. 거기 있는 자체로 인간에게 충분하다. 그 산을 등정한 사람이 있기에 올라갈 수 있는 산이다. 나도 한번쯤 올라가 봤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그러나 꼭 올라가야겠다는 다짐은 서지 않는다. 나의 일상과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내가 관계를 맺지 않아서 나온 결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산이 내게 관계를 맺자고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관계를 맺으려면 내가 다가가야 하는데, ‘관계없음’은 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지역에 있는 산은 다르다. 내가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해도 내가 함평에 살고 있는 자체가 이미 함평의 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함평의 산들과는 태생적으로 맺어진 관계다. 함평의 산과 나와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상호 호혜적이다. 내가 그 산에 가지 않아도 그 산과 나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내가 숨 쉬는 자체가 함평의 산들과 ‘관계맺음’이다. 나와 지역의 산들은 아주 친밀하다. 아주 깊은 관계다. 산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이름 없는 산도 이름을 만들어서 호명하고 싶다.

우리 고장에는 높은 산이 없어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산이 대부분이다. 함평의 산들은 우리가 찾으면 언제나 거기에 있다. 낮은 자세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해 오고 있다. 높은 산이 아니기에 사람들에게 비밀이 없다. 속살까지 다 보여주고, 조건 없이 곳간을 열어서 내 주었다. 곳곳에 숨겨진 비밀창고도 없다. 인간의 발길이 다 닿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층층 바위시렁의 것까지 다 내려 먹을 수 있는 것이 함평의 산이다. 이런 산이기에 사람들과 ‘관계맺음’이 유별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를 주었다.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먼저 가져간 사람의 차지였다. 지극히 인간적인 높이로 ‘거기에 있는’ 함평의 산. 산은 산불예방이나 건강을 위한 등산 대상만이 아니다.

산은 저마다 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 유용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며 살아왔다. 산과 일상에서 관계를 맺으며 생활하셨던 분들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산에 있는 무엇과 일상에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허둥거리게 된다. 산에 있는 자원은 활용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다양한 자원들은 앞으로도 계속 보존되고 활용 되어야 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지만, 우리고장 산들과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관계맺음이 절박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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