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 이글아이드 대표가 스파이크 부품생산 골프화 전문회사 창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명품골프화 ‘이글아이드’ 대표로

 

골프 동호인에게 ‘10도의 과학’이란 말은 잘 알려진 모토다. 골프화 밑창에 10도의 각도를 주어 스윙의 안정화를 꾀함으로써 스코어를 줄여준다는 뜻이다. ‘10도의 과학’으로 유명한 이글아이드의 김진호 대표(59).

김 대표는 무일푼으로 시작해 명품 골프화 브랜드 이글아이드 대표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김 대표는 함평 손불 지사리 출신으로 7살 때 가족이 담골로 이사 와서 잠시 지낸 후 다시 당매로 이사를 간다.

매우 가난했던 가족은 당매에서 월셋방 생활을 했는데, 5년간 나락 60석으로 계약을 했지만 해마다 정해진 나락을 갚아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던 때였다. 월세를 제때 못 내면 이자에 이자까지 물어야 하는 일종의 고리대금 방식이었다. 돈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난한 집안에서 3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 대표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밖에서 일을 찾아야 했다. 초등 졸업 후, 지독한 가난에 중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잠시 삼남교회에서 운영하던 야학에 다니기도 했다.

고향에서 잡일을 해보았지만 희망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 15살 때, 광주 송정리의 하우스 단지 파인애플 농장에 취업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농장주는 소년을 집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김 대표는 16살이 되던 3월 20일, 아직 바람 끝이 차갑던 이른 봄날에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 갈 차비도 없어 친척에게 빌려서 올라간 말 그대로 무일푼 상경이었다.

 처음 취직한 곳은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한 한식집이었다. 하지만 선배 종업원들의 텃새가 심했다. 서울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선배들에게 반항한다고 오해까지 받았다.

‘칫간’, ‘변소’라는 말만 쓰다가 서울에서 ‘화장실’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시절이었다. 식당 지배인이 모래를 한 바케스 사오라고 심부름 시킨 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고향에선 지천에 널린 게 모래 아닌가!’) 다녀오면서 식당을 찾지 못해 헤매기 일쑤였다.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김 대표에게는 그저 미로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독한 마음먹고 상경했기에 이런 저런 어려움들은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김 대표가 식당 종업원으로 정착하던 시기 그에게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식당 종업원 일은 입에 풀칠은 하겠지만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식당이 망하면 바로 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김 대표는 기술을 배우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해서 구로공단에 있는, 볼트를 생산하는 한 작은 공업사에 들어가게 된다. 낮에는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노량진의 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짜장면이 120원 하던 시절인데 월급이 9,000원이었다. 하지만 김대표는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에 월급을 있는 그대로 모두 고향에 보내주고 본인은 냉수로 허기를 채우는 고된 생활을 하게 된다. 빨리 현실을 타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를 앙다물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된다.

©이글아이드 생산공장에서 숙련공이 밑창작업을 하고 있다.

‘성실하고 부지런히 살면 꿈은 이루어진다’

근면한 생활이 몸에 밴 김 대표는 친구들보다 빠르게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 간다. 23세에 결혼한 김 대표는 28세에 개인사업을 시작하고 31살에는 집을 장만했으며 32살에는 회사도 인수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살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반면에 잡념만 갖고 사는 사람은 손발만 바쁘지 결국 이룬 게 하나도 없게 되죠.”

볼트 공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김 대표가 느낀 것은 볼트 자체만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그 기술을 적용해 고부가가치를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제3개발’이라는 회사에 기능직 직원으로 이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김 대표는 회사 사장과 협상을 하고 볼트 기술을 접목해 골프화 바닥에 들어가는 스파이크를 처음으로 개발하게 된다. 처음에 2명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직원이 3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골프 스파이크만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싶었고 결국 회사에서 독립해 나와서 ‘협진ECS’를 창업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행운이 찾아왔다. 마침 국내에 골프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상사가 맹위를 떨치던 당시 부산은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신발제조의 메카였고 김 대표는 부산의 모든 신발공장들에서 사용하던 스파이크 링의 98%를 납품하게 된다. 이때가 1986년이었다.

이후 ‘협진 ECS’는 매년 300~500%의 매출신장을 기록하며 신발업계에서 기염을 토하게 된다. 그러한 성공에 힘입어 2000년 김대표는 골프화 완제품을 생산하는 전문 골프화 제조사인 ‘이글아이드’를 창업하게 된다. 회사는 그렇게 매년 커나가 한때 직원이 80여명에 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가 급성장하다보니 여러 문제들도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수제화로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다보니 품질이 균질하지 못했고 또 간간히 안전사고도 발생했다.

©6층 건물의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 위치한 골프용품 전문백화점

그때 김 대표는 과감하게 생산직 인원을 줄이고 많은 자본을 투자해 공장자동화로 시스템을 바꾼다. 이후 국내에 골프붐이 불면서 한국이 세계 5대 골프 시장으로 떠오르고 그에 따라 수많은 세계적 골프전문 브랜드 회사들이 국내에 진출함으로써 국내 골프용품 업체들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된다. 국내산 브랜드 시장은 위축되고 거기에 임금상승까지 겹치면서 도산하는 기업들이 속출했는데, 김 대표의 ‘이글아이드’는 다행히 공장자동화 시스템이어서 버틸 수 있었다.

‘이글아이드’를 창립하고 골프화 완제품을 만들던 2000년, 김 대표는 제품의 장단점을 알기 위해서는 골프화를 직접 신고 실전에 뛰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프로 코치로부터 골프수업을 받게 된다.

당시 골프 치는 사람들은 대개 골프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이 골프를 그저 부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골프용품이 곧 사치품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외 유명 브랜드가 아닌 국내산 골프용품들의 경우 대개 저가형들이 많이 거래되었다.

그리고 그때 유행한 것이 방수 골프화였다. 당시 국내엔 골프장이 많지 않았고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새벽에 골프를 치는 일이 잦았다. 새벽에 젖은 잔디 위에서 골프를 치다보니 자연히 골프화가 물에 젖어 무거워졌고 방수 골프화가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많은 골프화 제조업체들이 방수 골프화에 올인 하다시피 했다.

‘10도의 과학’, 패러다임의 전환

김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전국에 골프장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으니 방수 골프화 유행도 일시적 일 거라고 판단했다. 여느 골프화 제조업체들이 골프화의 방수 개념에 전념할 때, 김 대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상하고 있었다. 골프화에도 뭔가 과학적인 소비자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 대표는 골프수업과 필드에서 뛰며 직접 느낀 바를 토대로 안정적인 스윙을 위해서 골프화 밑창에 10도의 각을 넣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인 ‘10도의 과학’이라는 모토였고, ‘스코어를 줄여주는 골프화, 이글아이드’라는 브랜드 슬로건이었다. 골프화 업계에서는 신선한 바람을 넘어 새로운 트렌드이자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받아들여졌다. 골프 동호인들은 ‘이글아이드’는 몰라도 ‘10도의 과학’이라는 말은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다. 골프화 출시가격도 중소기업 제품으로는 가장 고가여서 소비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글아이드’ 골프화 품질에 대한 김 대표의 자신감이었다.

 
   

선입견과 싸우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운동화에 스파이크만 붙이면 골프화로 통했던 시절에 김 대표는 징의 재질과 위치 등 최적상태의 골프화 생산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또 소비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한때 유연성이 있는 골프화 바람이 불면서 운동화 형태의 가벼운 골프화가 대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김 대표는 이글아이드의 딱딱한 재질을 끝까지 고집한다. 운동화 형태의 골프화는 유연성은 좋지만 뒤틀림이 심해서 내구성이 약하다는 판단이었다. 당장은 매출이 줄더라도 소비자들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버티었고 예상대로 운동화식 골프화의 유행은 곧 지나가버렸다.

또한 퓨전 바람이 불면서 경쟁업체에서 골프화와 등산화를 하나로 융합해 만든 퓨전 레저화를 출시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김 대표는 한 마디로 무식한 발상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등산화의 기본은 발목이 꺾이지 않도록 발목을 보호하는 것이고 골프화의 기본은 안정적인 스윙이 나올 수 있게 과학적인 균형이 맞춰져야 하는 것인데, 골프화와 등산화를 합쳐놓은 퓨전 레저화는 완전히 잘못된 발상에서 나온 제품이라는 것.

시장에서는 가끔 그런 엉터리 제품들이 소비자들의 오해 속에서 잠시 유행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김 대표는 제조업자 입장에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그런 흐름들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제품에 대한 충분한 전문지식과 이론이 있어야 시장의 일시적인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다.

 

‘혁신 또 혁신해야’

하지만 전문지식과 이론으로 무장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지간한 조건들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다. 일단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100% 확신을 가지고 달려들더라도 결국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김 대표도 이글아이드 골프화를 정상에 올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이글아이드’ 창립 후 브랜드를 론칭하고 생산된 골프화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김 대표는 ‘협진ECS’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전부 쏟아 부어야 했다. 10억을 투입하면 될 것을 100억을 들여 광고를 했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소비자가 지적하면 피드백을 받아 제품 개선에 나섰다. 시행착오를 통해 교훈을 얻고 제품을 혁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혁신은 일회용이 아니라 끊임없이 또 다른 혁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고무 스파이크를 업계 최초로 개발하게 된다. 쇠 스파이크는 안정적이지만 딱딱한 반면, 고무 스파이크는 안정적이면서도 착용감이 부드럽고 그래서 오랜 시간 신고 있어도 피로도가 적다. 근래엔 가벼우면서도 안정적인 296g 초경량 골프화를 내놓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디자인과 기능 혁신은 계속 되고 있다.

7년 전부터는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 골프 애호가들을 위한 6층짜리 골프용품 전문매장을 론칭해 운영하며 골프 동호인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김 대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든 끈기를 가지고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어요.”

유년시절의 가난에 대해서도 김 대표는 그것을 장애라기보다는 동기부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가 고파봤던 사람은 잘 알 겁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일구어가는 사람은 매일매일 얼마나 행복한지 느끼며 살아가요. 부모한테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과 자수성가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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