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권진주필

정월 대보름. 어린시절 해마다 연례행사로 하던 ‘작은설’의 풍속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함평 오일장의 정월 열 나흗날 보름장은 열렸고, 우리 고장 여러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냈다. 당산제는 당산나무에게 지내는 제사다. 나무에게 지내는 제사가 21세기, 2016년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어 나무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나무는 인류의 인큐베이터다. 나무는 인류의 수호천사다. 나무는 인류의 동반자다. 인류는 나무에 의존해서 난방을 해결했다. 나무로 불을 피워 사냥한 짐승과 물고기를 구워 먹었다. 부엌을 만들고 솥을 걸어 나무를 연료로 밥을 지어 먹었다. 나무에 의지해서 움막을 짓고, 초가를 지어 거주 생활을 했다. 인류 주거의 기본 인프라는 나무였다. 나무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 나무가 없는 인류의 주거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무에 대한 인류의 의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의 상당부분을 나무의 열매 채취로 해결했다.

나는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는 당산나무 한그루만 생각했다. 마을에 있는 몇 그루 노거수 나무만 생각했다. 저 나무들에게 해년마다 제사 드리며, 숭배하고 경외하는 것은 내 머리를 세뇌시킨 말 그대로 한낱 ‘미신’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다. 당산제, 당산나무는 마을의 앞산 뒷산의 수많은 나무를 대표하고 대신해서 제사를 받은 것이 아닐까? 당산제에 대한 기록에서는 당연하게 당산나무만 제사의 대상이다. 그러나 당산제는 마을민의 삶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모든 나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뿌리를 둔 제사가 아닐까?

지금도 우리는 나무에 의존해서 주거를 한다. 간식을 조달한다. 나무의 혜택 없이는 삶이 윤택해질 수 없다. 나무의 피와 살로 만든 열매를 먹고 있다. 나무를 재배해서 나무의 열매를 수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먹을거리를 보자. 우리가 먹는 과일은 전부가 나무가 주는 것이다. 나무에게 우리가 빼앗아 먹는 것이다. 나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빼앗아 먹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나무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다. 당연히 주는 것으로 안다. 한여름의 그늘은 어떤가. 철따라 나무에서 피는 꽃은 어떤가. 나무가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고 넓다. 우리에게 주거공간을 제공하고,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볼거리를 제공하는 나무들.

나무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나무들의 베풂에 맞게 감사하자. 나무들의 존재에 맞게 대우하자. 그것이 나무에게 우리가 갖춰야 할 예의다. 나무를 가꾸고 숲을 만들자. 나무들의 마을은 숲이다. 나무들의 집단 거주지는 산이다. 나무가 없는 공간에서 인간은 잠시도 살 수가 없다. 나무는 우리에게 신선한 산소를 준다.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나무는 녹색별 지구의 허브다. 녹색별 지구의 힐링이다.

마을마다 정월 대보름 무렵 지내는 당산제가 보존되었으면 한다. 정갈한 마음으로 지내는 당산제는 그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례의식만으로는 보존 계승에 한계가 있다. 지금은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고 과학적 근거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시대다. 지금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시대다. 나무를 땔감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당산제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면, 당산제에 대한 법고창신이 있어야 한다. 당산제의 정신은 계승하되 시기나 형식, 콘텐츠에 변화를 주어 마을축제화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듯이 나무는 두고 꽃만 테마로 한 축제가 아닌 진정으로 나무를 모시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해서 나무의 덕을 기리고, 나무와 상생하는 녹색생태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마을에서 당산나무가 가장 큰나무이므로 이에 따라 제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특별한 나무를 대상으로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를 주요 콘텐츠로 한 축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나무를 대상으로 하는 축제도 가능할 것이다. 당산제, 나무에 대한 예의라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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