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 나산그룹 안병균 회장을 만나다

 

맨주먹에서 그룹 총수로, 인생드라마

90년대만 해도 전국에서 함평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나산그룹 안병균 회장을 먼저 떠올릴 만큼 안병균 회장은 당시 재개에서는 신화적 인물로 통했다.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빈농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안 회장이 국졸출신으로 18세 때 단돈 2천7백을 들고 서울에 가서 공사판 일꾼에서 단역배우, 중국집 배달원, 요식업 사장, 의류업체 사장, 그룹 총수로 성장해가는 과정은 말 그대로 한편의 파노라마적 인생 드라마였다.

60년대 중반 거의 무일푼으로 상경해 서울생활을 막노동판에서 시작한 안 회장은 단역배우, 중국집 배달원 등으로 지내는 성실히 모은 돈으로 마침내 69년 광화문 근처에 '왕자관'이란 중국집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장사가 꽤 번창해 이듬해에는 '해녀' 란 이름의 일식집을 차릴 정도로 잘 나갔으나 74년 식당에 불이 나 종업원 2명이 숨지고 안 회장 자신도 사흘 만에 깨어나는 중상을 입는 좌절을 겪는다.

전 재산을 날리고 절치부심하던 안 회장은 특유의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이듬해 서울명동에 극장식 비어홀을 차려 재기에 나서게 되고 77년에는 시경 옆에 '초원의 집', 79년에는 화신백화점 뒤에 '무랑루즈' 란 극장식 식당을 차리면서 성공한 사업가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이 전속계약으로 무대에 섰던 이들 식당은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까요”라는 유행어와 함께 공전의 히트를 치게 돼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게 된다.

 

의류업계 뛰어들어 ‘조이너스’ ‘꼼빠니아’로 나산 신화 일궈

80년대에는 의류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식당을 해서 번 돈을 종자돈 삼아서 80년에 종로5가에 백화점과 재래시장을 혼합한 형태의 의류도매센터를 설립해서 본격적으로 기업가로 변신한다. 유명 의류메이커의 재고품을 정가의 25%에 사다가 40% 가격에 되팔아 이윤을 남기는 독특한 아이디어로 의류도매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82년에 설립된 여성복 전문의류업체인 나산실업을 통해 마침내 ‘조이너스’라는 80년대 최고의 의류브랜드를 론칭하기에 이른다. 안 회장은 ‘조이너스’와 ‘꼼빠니아’ 브랜드를 만들며 창업 후 10여년 만에 재계랭킹 50위권에 드는 기적을 이룬다. 나산 신화를 쓰며 의류업계의 총아로 떠오른 것이다.

이후 안 회장은 부동산, 건설업 등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며 나산종합건설, 나산유통 등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총수로 성장한다. 당시 안 회장이 언론에서 주목받았던 것은 특히 91년도에 재벌기업총수들을 제치고 납세실적이 1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87년 이후로는 납세실적이 20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 주변에서 시기질투하던 사람들의 중상모략과는 반대로 탈세 없이 세금을 꼬박꼬박 낸 것이었다.

 

20년 만에 일군 성공신화, IMF로 하루아침에 몰락

20여년만에 급속성장했지만 몰락도 한 순간이었다. 나산그룹은 IMF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1998년 최종 부도처리되는 비운의 길을 걷게 된다. 무리한 계열사 확장과 부채증가로 자금난에 빠진 것이 당시 언론에서 분석한 원인으로 회자되었으나 사실 그 뒤에는 호남출신 그룹 총수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차별도 작용한 듯 보인다.

IMF 당시 재계 30대 그룹 중에서 17개가 사라졌고 13개만 생존할 수 있었는데 나산그룹은 당시 재정건전성이 좋은 편에 속했으나 IMF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자본과 정치의 희생양으로 볼 수 있는 대목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재계 3위였던 대우, 5위 쌍용, 6위 동아건설 등이 차례로 도산을 당했듯 나산그룹도 그룹퇴출의 예봉을 피할 수 없었다.

IMF 당시 외환은행장이 나중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안 회장에게 미안한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당시 은행권들은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빚이 많은 그룹들보다는 오히려 투자금 회수가 가능한 빚이 적은 그룹들을 상대로 정리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나산그룹은 빚보다 담보가 몇 배 컸으나 IMF체제에서 담보가치가 급락하면서 자금압박이 들어왔던 것이다. 거기에 정경유착을 싫어해 평소 정치인들과 거리는 두는 안 회장의 스타일도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세계화의 의미를 잘 새겨야”

어느덧 고희(古稀)의 나이에 이른 안병균 회장. 비록 IMF로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었지만 안 회장은 우리 국민이 IMF의 교훈을 잘 새겨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 회장은 한국이 IMF로 국가부도사태에 이른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IMF로 한국의 수많은 국부가 헐값에 외부로 빠져나가 버렸지만 반면에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가 적극적인 벤처기업 육성정책을 펴고 IT기술에 과감하게 투자하면서 우리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이룰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IMF으로 몰락하기 전, 안 회장이 1990년 테헤란로 선릉역 인근 초역세권 위치에 오피스텔 ‘샹제리제 빌딩’을 지었던 것은 선견지명이었고 그것은 90년대 후반 테헤란로의 오피스텔 붐으로 이어졌다. 그가 만든 벤처빌딩에 당시 안철수연구소를 비롯, 여러 IT벤처기업들이 입주해 들어왔고 현재의 IT기술들은 그때 다 나왔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의 디지털 TV, 자동차, 스마트폰 등이 모두 당시 벤처기업의 IT기술을 밑바탕으로 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역설한다. 안 회장은 “IMF로 우리 국민들이 굉장히 큰 괴로움을 당했지만 반면 그로인해 한국사회가 체질개선되는 기회가 됐고, 변화를 이겨낼 수 있는 내성이 생겼고 국민들의 마인드도 변화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것이 10년 후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 한국이 국제영향을 덜 받고 어렵지 않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고.

반면 IMF이후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극심한 사회적 불평들이 초래한 점은 우리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로 지적한다. 안 회장은 “서구적 자본주의가 짧은 시간 안에 들어와 한국의 평등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의 극심한 빈부격차로 이어졌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빈부격차를 줄여갈 것이냐”가 우리의 당면과제라고 말했다.

안 회장은 “한국은 의류의 95%를 국산으로 입는 나라입니다. 세계에 이런 나라가 없죠.”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이 진짜 선진국인데 우리나라 국민들만 그걸 모른 것 같다.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재산은 압류가 돼도 사람 머릿속 능력은 압류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현재는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쌓아온 지식과 경영노하우를 사업가인 아내의 회사에 조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리버사이드호텔의 회장으로 있는 안병균 회장은 수차례 경매에 나오며 당시 가장 골치 아픈 회사로 알려졌던 호텔을 지금은 가장 튼실한 호텔로 탈바꿈시켜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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