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들일 때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아침에 일어나니 설악산을 머리맡에 두고 잤다. 연이어 붙어 있는 커다란 유리창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내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산수화다. 그리고 살아있는 그 그림은 나에게 마음의 번뇌까지 씻어준다.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났다.

옛날 어느 나라에 그림에 아주 조예가 깊은 왕이 살았단다. 그는 한없이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싶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큰 상을 준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재주가 깊다고 생각한 많은 화가들이 그 나라를 찾아왔다. 그리고 각자의 그림을 그리느라고 모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한 사람만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산책을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아주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드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감 시간이 되어 모두들 그림을 내는데, 그 화가만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심사관들이 그 사람의 방으로 가보니 한 쪽 벽에 커다랗게 하얀 천이 덥혀 있더란다.

그래서 그 화가에게 이유를 묻자 그것이 바로 그동안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사관들이 그 하얀 천을 잡아당기자 거기에는 아주 큰 거울이 하나 붙어있었다. 아니 그림은 어디가고 거울만 한 장 붙여놓았느냐고 묻자, 그 화가는 거울 속을 잘 들어다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거울 속을 보니 앞산이 펼쳐져 있고 개울물이 흘러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흔들리고 있더라는 것이다.이따금 그 그림 속에는 산새들이 지나가고, 따뜻한 하오의 햇볕이 부드럽게 온 대지를 쓰다듬고 있더라는 것이다.

문득 시 한 구절도 생각난다.

평생 고생하여 초가삼간 지어놓고
너 한 칸 나 한 칸 달님 한 칸 들여놓고
청산은 들일 때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아, 이 얼마나 장쾌한 시인가. 나는 이 시를 암송할 때 마다 마음속까지 시원해진다. 현대인들은 서로 만나면 별 차이도 없는 아파트 평수를 늘어놓으며 서로 자랑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의 선인들은 이런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공유해야 할 자연물들을 집안으로 들이거나 방안으로 끌어들여, 그 작은 심미안으로 자기들만 보기에 여념이 없는데 저 광휘로운 대자연을 집 밖에 그대로 둘러두고 본다는 선인들의 그 너른 가슴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장자도 '천지간에 숨겨놓고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로 만나면 인간 사이에 정이 오가는 이야기는 없고 부동산 얘기에, 증권이 어떻고, 아이들의 성적이 어떻고, 이번 방학 때 어느 나라로 유학을 갔느니, 하면서 그것으로 자기 과시, 서투른 자기만족을 한다.

벌레 한 마리가 급하게 아침 방바닥을 지나간다. 베게로 쭉 밀었는데 그만 그 충격에 기절을 하였는지 꿈적도 않는다. 나는 오늘 아침도 일어나자마자 살생부터 했나보다. 마음속으로 참회기도를 해본다.

티벳의 스님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마당부터 쓴다고 한다. 혹시나 자기 발아래 벌레라도 한 마리 밟힐까봐, 조심조심 아래를 보면서 쓴다고 한다. 그리고 길을 걸을 때도 살얼음을 밟듯 아래를 잘 보고 걷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침에 눈 뜨고부터 얼마나 많은 살생을 하는가. 우리들 입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온갖 살생 투성이가 아닌가.

우리가 맹수들을 잔인하다고 하지만, 어디 그들이 먹을 만큼 먹으면 필요 없는 살생을 하는가. 그렇다고 저장을 하는가, 더 먹겠다고 서로 아귀다툼을 부리는가. 오직 인간만이 저장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무자비하게 자연과 동물을 학대한다. 오직 자연과 인간을 별개의 존재로 착각한다.

사람들이 한 사람만 잘못되면 뉴스에 나오고 서로 애도하고 떠들썩한데, 동물들이나 곤충들은 마치 장난하듯이 그 목숨들을 거두어버린다.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힘들다고 푸념만 하고 온갖 쓰레기를 마구 버린다. 이 우주에 공존하는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서 아주 작은 배려도 없이, 인간의 역사는 극한의 이기주의로만 치닫고 있는 현실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 햇님, 물님, 산님 나무님 등등에게 한 번이라도 고마운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거나, 살아본 적이 있는가?

이른 아침 큰 산과 대좌하여 내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본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人間)이라면 당연한 정서가 아닌가.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그런데 현대인들은 한정 없이 정서적으로는 메말라 시 한 구절, 심지어 하루에 하늘 한 번 보고 사는 사람들이 드물다고 한다. 사우나 밖으로 나오니 오른쪽 편으로 정자와 수돗가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밥을 해먹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서둘러 짐받이에 있는 가방을 내려 코펠, 버너, 등을 내리고 쌀을 씻었다. 수돗가를 따라 내려가는 하얀 생명수. 잠시 후에 하얗게 올라오는 맛있는 밥 냄새, 문득 농부님들의 고생이 한없이 고귀하게 느껴지고, 한 톨의 쌀이 정말 영겁을 돌아온 것처럼 귀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사회의 현주소는 물자가 넘쳐나고, 도대체 부족한지를 모른다. 부족을 넘어서, 낭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나간 역사를 돌아보면 한 국가의 멸망은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 만용과, 성의 극심한 문란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저 해가 지지 않은 로마의 스러짐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불과 이삼 십년 전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지금의 저개발 국가들처럼 외국의 원조에 의해서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옛날 강대국들이 우리에게 했던 것들과 똑같이 약소국 국민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때리고 옷갓 못된 짓들을 하고 있지 않는가.

중국에 가서는 보신제를 싹쓸이 하고, 동남아에 가서는 온갖 섹스관광에 배드 코리아(bad korea)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 않는가. 지하도에 걸인들은 늘어나고, 인류의 반은 물 부족, 식량 부족으로 굶어죽어가고 있는 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내 돈 내고 내가 먹으면 그만이고, 그것이 낭비를 하듯 그냥 버리듯 무슨 상관이냐고 노려보는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다. 더더구나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다.

그렇지만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나비현상>도 있지 않는가. 지리산에서 치는 나비의 날개짓이 태평양에서는 폭풍우로 밀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한정된 공간에서, 이 한정된 식량으로 내가 밥을 두 그릇을 먹으면 이 지구의 어느 한 편에선가는 한 사람, 아니 여러 사람이 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나 혼자 독단으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물질들을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으로 보거나 존재해 있는 모든 영혼들의 작용 또는 그와 비슷한 원리로 살아 있다고 보는 철학체계인, 물활론[物活論, hylozoism]과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사는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물 한 바가지를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며, 한 끼의 식단을, 아니 먹을 것이 없어 굶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같은 지구에서 동(同)시대를 살면서 인류의 반은 비만으로 죽고, 그 반은 굶어서 죽는다는 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러므로 내 것을 내가 써도 죄악인 경우가 참 많다. 오히려 잘못 쓰면 사회에 큰 독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어른들도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환원)하고, 만물을 귀히 여기는 습관을 길러 준다며 자녀들의 윤리 교육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 자녀들은 부모에게 불효하지 않으며, 항상 이웃에게 칭찬 받은 귀한 자녀로 살아갈 것이다.

기실 세상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서로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장소이지 않는가. 서양의 추수 감사제나 우리의 마을 신앙인 동제(洞祭)도 다 '만물은 서로 상생(相生)한다'라는 기본적인 인간정신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지 않는가.

이제 밥은 뜸까지 적당하게 들은 것 같다. 김치와 김 두어 가지 반찬을 내어 놓아도 꿀맛 같은 밥공기는 금방 사라진다. 정자에 두어 사람 앉아 있고 건너편 정자에는 한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목소리를 높여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 이제 출발이다. 한참을 가다 건너편을 보니 팻말이 하나 있다. 돌아보니 내가 지나왔던 길이 표시되어 있다.

저것이 어제 내가 지나온 길들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설악산 계곡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돌탑이 나타났다. 그 앞에서 땀을 좀 식히고 출발했다.

멀리 쉼터가 하나 보인다. 내려가 보고 싶지만 시간을 많이 소비할 것 같고, 주머니도 가벼워 그냥 갔다. 앞에 십이선녀탕 팻말이 하나 보인다. 아니 한두 명도 아니고 열두 선녀나 내려왔을까.

문득 환한 보름달이 뜨는 날 열두 선녀가 내려오는 그 기이한 장관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곧 이어 만해마을 팻말도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기 전 버스가 서고, 그 앞에는 간이 슈퍼가 하나 있다. 막걸리도 한 잔 목을 축일 수 있고, 주머니가 더 든든하면 맥주도 한 잔 할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백담사를 지나온 계곡의 물들이 어린 아이들과 같은 소리를 내면 급히 흘러가고 있었다.

저 물들을 저렇게 급하게 어디로들 가고 있는 것일까. 성급한 아이들처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서둘러 이 장소를 떠나는 것일까. 과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덩치만 커지지 더 탁해지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어른이 되어서 무얼 할 것인가.

아이들아, 그렇게 급하게 흘러가지 말고 여기에서 머물며 들꽃들도 보고 송사리들과 장난도 하며 어떨까?

바위 사이를 지나간 물은 벌써 산모롱이를 돌아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낮의 태양은 따갑고 미루나무만 성성하게 온 몸으로 그 땡볕을 받고 있었다.

나는 매년 일 년에 한 번 정도 이 만해마을과 백담사를 찾아온다. 항상 7월말이나 8월초가 되면 많은 세미나와 시인들의 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이 자전거 여행 때문에 못 올 것 같다.그래서 이번에는 더 빨리 지나가는 지도 모르겠다. 이 만해마을의 직접적인 조성이유는 아마 만해 선사의 힘이 컷을 것이다. 그분의 높은 지조와 맑은 시적 정신, 거기에 백담사 주지스님인 오현 스님의 힘이 보태져서 말이다.

또한 오현 스님은 현역 시인으로서 왕성하게 글을 써내시고 있다. 작년 여름에도 백담사을 찾았을 때, 그 환한 밤에 옥수수와 감자를 서로 먹으며 스님과 함께 공연을 보았던 기억도 났다.

만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조그마한 간이 매점이 있고 <시벽>이 맨 먼저 우리를 반긴다.
이 벽에는 몇 년 전 세계 시인대회를 하면서 세계의 시인들과 우리나라 대표적이 시인들의 시를 벽에 붙여 놓고 있다.

여기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많은데 나이지리아 작가로 영국의 리즈 대학교 영어과를 나와 아프리카 지역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소잉카(Wole Soyinka)의 글이 눈에 띠었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인간 정신의 지평을 열어 주는 어떤 예술 작품도 그 본질상 변화를 위한 힘이고 변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금강산에서 열리는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한 소잉카는 당연히 북한에서 열리기 때문에 북한 시인들과 한국 시인, 또한 세계 각국의 시인들이 어깨동무하는 해후를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격한 감정을 토론하기도 했다.

"세계 어느 나라 시인이 정부 허락을 받아야만 다른 나라의 시인을 만나고 문학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느냐."

고 언성을 높이면서 칠순이 넘은 노객은 격한 감정을 내보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곳 만해마을에서 주최하는 2005 만해축전, 제9회 만해대상 문학부문을 수상하였다. 이 시상식에서 그는 "시인은 왜 인간사에 전쟁과 폭력이 계속되는지 해답을 주진 못한다, 다만 시인은 어둡고 깊은 지하에서 험한 작업을 통해 금을 캐내는 광부처럼 그 빛으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 이라고 그 수상소감을 밝혔었다.

벽을 따라 몇 발자국 더 걷다보니 우리나라 대표적인 중견시인인 송수권 시인의 시도 눈에 띤다.

땅끝 마을에서 부르는 노래 - 송수권

달마산 찾아 땅끝 마을.
뿔끈 솟은 사자머리 턱봉을 오르니
오늘은 바람 불고 물파랑만 높다
저 미황사 스님들 궁고 치는 날인가 보다

백두대간을 따라오다 마지막 끝난 지점
돌아서서 보면 다시 처음의 시작이기도 한
이길은 언제나 희망이였고 믿음이였다
그러므로 축복이 열리는 땅
갈두리에 와서 하룻밤 지새고나니
가슴 속에 벌써 불곰같은 아침해가 뜬다.

누군가 첫발을 내딛었을 때
그 길은 늘 혼자였고 두려움이었다
그러므로 내 외로운 낮선 방황도
오늘 이곳에 와서 첫발자국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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