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남성숙 사장

필자는 요즘 참 우울하다. 매일매일 시사를 체크하는 신문 만드는 사람이 우울하다는 것은 곧 우리 사회가 우울하다는 증거다. 필자처럼 한국인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을 비교한 2015보고서에서 한국인의 삶 만족도는 OECD 34개 회원국 중 하위권인 27위다. 올해 유엔 세계 행복의 날에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이 실시한 행복도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143개국 중 118위를 기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자는 우리 현대사를 불행하게 하는 주 요인이 ‘정치 스트레스’라고 본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지역의 핵심사안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국민이 원하는 최소한의 ‘합리적인 선’을 제시 못하는 정치가 국민을 심리적인 불안과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다. 작금, 한국 전체를 공분과 분쟁으로 몰아넣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이 그 좋은 사례다.

필자가 보건데, 이 논란의 핵심은 현행 검인정 교과서의 편향성 문제가 아니다. 여기엔 역사를 둘러싼 이해당사자들 간의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대립과 갈등, 계산 셈법이 숨겨있는 것 같다. ‘역사전쟁’까지 선포하는걸 보면, 단순히 잘 가르치자는 문제를 넘어선다.

전쟁을 선포하자 반대하는 목소리가 각계각층에서 불타고 있다. 역사학계와 교육계, 시민단체, 그리고 일반시민까지 맹비난하며 철회를 강력 요구하고 나섰다. 광장 거리에는 촛불이 다시 켜졌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반대 피켓을 들고 있다. 보수 학계와 교육계를 중심으로 찬성 성명도 급히 번지고 있다.

국정교과서는 사관(史官)의 집필 대상인 국가나 정부가 직접 ‘사관’이 되겠다는 발상이다. 민주화 시대가 아닌 기원전에도 사관은 독립체였다. 기원전 607년, ‘동호지필’로 전해내려 오고 있는 얘기가 있다. 진(晉)의 영공이 충언을 잘 하는 재상 조둔을 살해하려 하자, 조둔이 다른 나라로 도주하던 도중, 국경을 넘기 직전에 하위관리가 영공을 시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둔이 돌아와 재상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이를 두고 사관인 동호가 ‘조둔이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사서에 기록하였다. 조둔이 ‘나는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고, 시해한 사실도 알지 못하였는데 왜 그렇게 쓰느냐’고 항의하면서 역사기록을 고쳐달라고 하였으나 동호는 이를 거절하였다. ‘당신은 재상직에 있었고, 도망을 간다며 가다가 국경을 벗어나지도 않고 돌아와 다시 재상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하수인을 처벌하지 않았다. 당신이 모의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해도 누가 믿어주겠는가. 옳고 그른 것은 사관의 소신이므로 내 머리를 벨 수는 있어도 사관을 고칠 수는 없다’ 도량이 넓은 조둔은 이에 탄식하며 사관을 용납하였다.

또 다른 사관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장공 6년(기원전 586) 호색한인 장공은 신하 최저의 부인을 유혹하다가 그만 최저에게 살해당했다. 최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제나라 사관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최저는 사관을 죽였다. 그러자 사관의 동생이 나타나 다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썼다. 최저는 동생까지 죽였다. 이번에는 사관의 막내동생이 나와 역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천하의 최저라도 막내동생 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조선시대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의 발단은 사초에 있었다. 당시 실록 편찬의 책임자로 있던 훈구파의 이극돈이 실록 편찬을 위해 사초를 검토하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게 되었는데,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글을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고 이것이 연산군에게 알려져서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왕조실록의 자료가 되는 사초에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사관의 비평이 곁들여 졌다. 당대의 올바른 역사 기록을 목숨을 담보로 기록하였던 신념의 역사가 또한 왕조실록의 역사다. 왕의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인물에 대한 기록까지 담았다. 어느 임금이건 자신의 치적은 크게 드러나고 허물은 감춰지길 원했지만 조선시대 왕은 말직에 있는 사관에게 자신을 미화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역사는 누가 기록하는가는 중요하다.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싶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은 역사의 기록은 준엄하고 현실의 불의를 막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의식은 자기 삶에 대한 경계와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사회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바탕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그것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뿐이고, 이후에는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늘 조심하고 경계했다.

현 정부 교육방침 기본틀은 ‘창조’다. 다원적 관점에서 교육한다는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역사 선생님들은 한 과정을 수업한 다음 학생들에게 나의 관점, 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쓰도록 한다. 역사교과서는 나와 공동체의 삶의 궤적을 돌아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되지만, 아무리 잘 쓴 교과서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암송하고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역사를 공부하는 의의가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점을 포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교과서보다는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자극하고 열린 태도를 길러주는 교과서가 더 좋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다른 관점에 대한 생각의 싹을 죽이려는 국정교과서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담당할 수 없다.

역사 기록의 기본은 정직함과 당당함이다. 곡학아세(曲學阿世)가 판치는 이해관계에 얽혀 왜곡과 편향 시각을 갖는다면 바른 역사 기록이라 할 수 없다. 중국 진나라의 사관 ‘동호’가 2015년 10월 대한민국 역사를 기록한다면 이렇게 적을 것이다. ‘역사가의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 할 정부나 정치지도자가 오히려 국민에게 역사전쟁을 선포하고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광주매일 남성숙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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