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목상고 교장

교육은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 간의 상호작용이다. 가르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제자를 사랑하는 교사와 배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선생님을 신뢰하는 학생의 관계에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교육 가능성, 교육 사랑 그리고 교육 신뢰가 유지된다면 어떠한 학생들이라도 배움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라는 격언을 인용해 보자. 이러한 바람직한 교육적 관계 속에서는 학습에 실패를 거듭하는 학생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배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최근 수학이나 영어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위 수포자나 영포자인 학생들의 비율이 심각하게 높다는 보도가 자주 나온다.  더욱이, 국어나 사회, 과학 등 일반 교과에서도 초등학교 때부터 학습부진이 누적되고 중·고교 단계가 되면 교과 진도를 따라갈 수 없는 학생들이 많다.

교과서 내용은 물론 기본적인 어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 때문에 정상적인 수업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학생들의 학습 가능성과 교사들의 수업 가능성에 의문이 생기고, 이로 인해 학생과 교사 간 교육적 사랑과 신뢰가 약화됨으로써 학교의 교육활동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위기현상이 우려스럽다.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의 낮은 수업이해도 문제가 교육의 가능성에 의문을 갖게 하지는 않는다. 학교급별로 볼 때, 초등학교 시기는 학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공부할 내용이 많지 않고, 학습내용의 누적 정도도 심한 편이 아니어서 교육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학생들의 모든 교과목 수업을 혼자 담당하면서 학생 개개인의 학력수준 등 제반 사항을 파악하고 있기에 학습실패를 겪는 학생이라도 학습포기 단계로 진입을 차단해 줄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부모들은 초등학생 학습수준 정도는 직접 파악하여 지도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학교부터는 초등학교에 비해 학습지원 대책을 찾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수학 포기 학생, 영어 포기 학생, 또는 전반적으로 학습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본학력 미달 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실패 경험들이 누적된 결과이다. 고등학교 시기엔 학습포기 현상을 파악하여 지원하고자 해도 적절한 대책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다.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학습포기 대책이 어려워지면, 학력 부진의 원인과 책임이 점차 학교와 교사로부터 학생 자신과 부모로 전가되는 안타까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고등학교 교사들 중에는 가정교육과 초등학교 교육을 통해서, 늦어도 중학교 시기까지는 이미 습득했어야 할 기본적인 학습 어휘나 수학, 영어 등 기초교과 지식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나 교육과정 운영 기술이 없다고 말한다. 이를 무책임한 교사들의 변명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가정의 교육지원 측면에서 그리고 학업성취 수준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는 빈부격차, 도농간의 격차가 엄연하게 존재한다. 올해 초에 서울신문은 '2015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를 연재하면서 1월 16일 첫번째로 교육편을 다뤘다.

가정배경에 따른 교육격차의 원인으로 사교육 참여 여부가 흔히 논의되지만, 기자들은 교육격차의 주 원인으로 어휘력 차이를 들었다. 기자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빈부 격차에 따른 수준차가 뚜렷한 과목은 국어이며, 국어를 못하면 다른 모든 과목을 제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에 공부 전체를 망치게 된다는 점을 밝혔다. 어휘력이 빈약한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휘력 탓에 모든 교과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당 기사에 많은 독자들이 반응했다. 이에 따라 “초교 때 어휘력 고3까지 가더라”는 제목으로 1월 12일에 후속 리포트가 나왔다. 어느 시골 고교 교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농어촌 학생들의 어휘력이 매우 낮아 학습의욕은 점점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등학생이 되면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예컨대 고1 사회 교과서에 ‘지구촌화됐다’라는 뜻을 모른다. 사실 이 표현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배웠을 법한 것이다. 교사로서 현실이 안타깝지만 이러 아이들을 한명씩 붙잡고 가르칠 여력이 안 된다.

수업시간은 매주 2시간뿐인데 학급당 학생수는 30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의 이야기대로 교육포기의 발단인 기본 어휘력 약화는 초등학교 단계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관점은 학력저하, 교육포기의 현상이 중·고등학교 교육의 문제로 여기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상당히 다르다. 어떤 사회적 과제에서도 문제가 드러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 시기의 어휘력 약화는 장기적으로 큰 교육문제가 될 수 있다. 다행히 정부에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18년부터 적용하기 위해 9월말 확정 고시될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기본적인 어휘력 부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부터 한자를 병기하여 모든 학생들의 기본 어휘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우리말의 70-80%를 차지하는 한자어의 뜻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중요한 용어에 한자를 괄호로 제시하고 설명을 더해 주겠다는 계획이다.

현재까지도 학자나 단체의 성격에 따라 한글전용과 한자병기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한자병기 반대론자들은 그것이 초등학생들의 학습부담을 가중시키고, 한자 사교육을 유발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에 반해 찬성론자들은 학습부담이 다소 늘더라도 학생들은 학습용어 이해를 통해 공부하는 재미를 훨씬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중·고교 시기 이후 학생들이 어휘력 부족으로 인해 학습에 어려움을 겪게 되거나 심지어 포기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교에만 교육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 지역의 농어촌 교육 현실에서 한자병기 논쟁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자병기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대도시지역 초등학생들은 어휘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방과후학교, 사교육이나 가정교육으로 한자어 공부를 하고 있다. 지역과 가정 배경에 따라 이미 초등학생들의 한자어 수준 차이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기부터 학력 격차가 심화되는 것을 막고, 어휘력 수준 차이 때문에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한자어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도농간, 빈부간 차이 없이 모든 초등학생들이 한자가 병기된 교과서로 어휘력을 키울 수 있게 하겠다는 개정 교육과정의 한자병기 시책의 방향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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