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게 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멍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신 2009년 8월18일 낮 1시 43분. 그 시간으로 한 시대가 끝났다. 대한민국의 가장 격렬하고 가장 충실했던, 위대한 시대가 끝났다. 나의 작은 인생에서도 그 시간으로 청춘이 끝났다.

DJ께서 제1야당 대통령후보로 결정되신 1970년에 나는 대학 1학년생이었다. 그 분의 국가적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해에 나의 누추한 청춘도 본격 시작됐다. 그 분을 뵙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자랑이었고, 그 분의 연설을 듣는 일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 분의 연설 때문에 나는 수업을 빼먹기도 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분은 패배하셨다. 나는 세상이 결코 달콤한 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어른이 되고 있었다.

그 분은 망명을 떠나셨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왔다. 그리고 신문기자가 됐다. 내가 견습기자 딱지를 벗자마자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나는 총리실 담당이었다. 총리실은 사실상 청와대가 됐다. ‘서울의 봄’이 왔다. 귀국해 계셨던 DJ는 복권됐다. DJ복권을 나는 감격적인 기사로 썼다. 그 기사는 보도되지 못했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는 DJ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정치를 정지시켰다. DJ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두환정권은 한미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측은 DJ감형을 한미정상회담의 조건으로 걸었다. 나는 외무부 출입기자였다. 나는 외무장관실에 숨어들어가 DJ의 생사를 취재하곤 했다. 어느 날 외무장관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나에게 올려 보였다. 신문사에 DJ감형을 보고하면서 나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검열 때문에 DJ감형도 보도할 수 없었다.

DJ께서 대통령에 두번째 도전하신 1987년에 나는 DJ 전담기자가 됐다. 나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DJ를 커버했다. 전국 순회 유세 중에 DJ의 승용차에 가장 자주 동승한 사람도 나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충실한 기간이었다. 노란색 물결을 이루었던 DJ의 광주 조선대 연설을 나는 “유채밭 같다”고 보도했다. DJ는 또 낙선하셨다. 낙선 열흘 뒤에 나는 텅빈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서 망연하게 창밖을 바라보시던 DJ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그 기사는 DJ 지지자들을 울렸다. DJ 반대자들은 나를 멀리했다.

내가 동경특파원으로 일하던 1991년 내 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 돌아가시기 2년 전에 DJ로부터 “이(낙연)기자는 변함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을 들으신 것이 아버지 인생의 마지막 자랑거리였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효도이기도 했다.

1997년12월 DJ는 마침내 대통령이 되셨다. 2000년에 나는 DJ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나는 그해 남북정상회담 사전설명반의 일원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느라 국회의원 선서도 못했다. 그해 DJ는 노벨평화상을 받으셨다. 나는 DJ지지자들의 기념행사에서 거의 매년 축사를 했다.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대통령님의 위대한 생애와 업적을 몇 백번 몇 천번 재평가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DJ와 관련된 나의 경험은 책으로 써야할 정도다. 내 삶은 DJ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DJ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나에게 실감될 리가 없다. 마치 아버지와의 이별을 알지 못하는 아이처럼, 나는 DJ서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DJ서거를 제삼자로서 말할 수가 없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님처럼 위대한 인간을 내 나이 스무 살부터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김대통령님께도 영원히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 분이 계셔서 나는 행복했고 충실했다. 아직 나는 김대통령님의 명복을 빌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나에게 김대통령님은 아직도 살아 계신다.

2009. 8. 18. 저녁
국회농림수산식품위원장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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