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거목’ 서거를 애도합니다

‘살아서 큰 그늘 펼치던 나이 많은 나무가 쓰러질 때 가장 큰 소리를 냅니다’

거목이 쓰러졌다. 큰 별이 졌다.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민주화의 상징'이자,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 수상'으로 민주주의와 평화와 인권의 화신이었던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 ‘행동하는 양심’ 김 전 대통령이 파란만장한 영욕의 85년 삶을 뒤로 한채, 역사의 뒤안길로 연기처럼 사라지셨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온갖 고통을 이기고 인동초처럼 피어올랐지만 노후의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18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기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한마디로 '인동초'(忍冬草)처럼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정치의 거목(巨木)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섯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가는 세월의 벽은 끝내 넘지 못했다.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김 전 대통령은 파란만장한 삶 만큼이나 민주화의 산증인으로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험난한 정치역정 속에서도 IMF 환란을 극복했고 ‘햇볕정책’을 통해 6.15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전기를 이뤄내면서 분단 55년의 벽을 허물고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민주화 투쟁과 남북화해를 위해 힘쓴 공로로 대한민국 사상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돼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게 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놓지 못했던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게 되었다.

김 전 대통령의 삶을 가장 빛나게 한 것은 온갖 역경과 박해를 무릅쓰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온몸을 헌신한 것이다. 그는 민족의 분열 대신 화해와 협력을 위해 최후의 한 방울까지 모든 열정을 다 쏟고 영면했다. 그는 남북협력을 통해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라시아까지 새로운 문명을 여는 웅대한 꿈을 키웠다. 훗날 남북이 하나가 될 때 그는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자 세계적 안목의 지도자로 추앙받을 것이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불의에 항거하는 행동하는 양심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사람들까지 조건 없이 용서한 화해의 윤리야말로 진정한 위대함의 증거였다. 만해 한용운, 백범 김구의 삶이 그랬듯이 후광(後廣) 김대중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권, 정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투쟁과 함께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넘어선 포용적 소통의 철학과 평화의 사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가치는 세계적이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함께 비 서구인으로서, 그가 인류의 새로운 문명에 미친 공적은 바로 그의 삶에 녹아 있는 숭고한 희생정신에 있는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영욕이자, 소설이었다. 사고를 가장한 암살 위협, 납치와 가택연금, 망명, 사형선고 그리고 4번의 대선 도전 끝 대통령 당선과 노벨평화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그는 '인간 김대중'일 수 없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정치라지만 그는 유독 '정치인 김대중'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에게 질투와 질시는 천형과 같은 법. 그가 짊어졌던 삶이 본인의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보이지 않는 운명의 강요였는지 눈 감아 버린 그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인동초'라는 별명이 상징하듯 굴곡이 크고 깊었다. 지역주의 논란이 제기되면 자주 인용되는 일화이지만 그는 1961년에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40대 기수론'을 먼저 내세운 다수파 김영삼 의원을 당내 경선에서 힘겹게 이기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헌법을 고치고 3선을 획책한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하였다. 조건과 정황상 이길 수 없는 대결에서 그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는데, 이러한 뛰어난 정치적 능력은 핍박으로 이어진 그의 정치역정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특히 고난의 정치역정에서 김 전대통령은 지역주의의 수혜자라는 비난을 독점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는 지역주의의 수혜자가 아니라 희생자였다. 1970년대 이래 한국 사회에서 지역주의의 숨은 수혜자는 영남 출신의 정치인들이었고, 김 전대통령에게 퍼부은 지역주의의 비난은 권력을 장악한 쪽에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동원한 수사이자, 그의 정치적 입장과 정책에 대한 국민의 정확한 이해를 저지하기 위해 새겨넣은 '주홍글씨'였다.

그에게 퍼부은 더 무거운 주홍글씨는 '빨갱이'였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냉전'을 권력 유지의 중심 기반으로 삼는 세력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좌빨'이라는 용어가 힘을 행사하며 횡행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를 옭아매었던 이데올로기적 굴레들의 강고함을 짐작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화려한 수사와 치밀한 논리, 핵심을 찌르는 표현으로 대중을 압도한 명연설가이며 대중정치인이었다. 그는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며 현대한국정치사의 역동성을 표현하기도 했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는 말을 즐겨 썼다.

2009년 8월18일. 그는 떠났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85년 인생을 쉼 없이 살다갔다. 김대중의 죽음은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 통한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2009년 5월 29일, 후배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아이처럼 울던, 그리고 또다시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의 빈 자리를 이제 누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처럼 역사를 몸으로 웅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현실적 패배 속에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다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죽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위대한 정치지도자였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순탄하지 않았던 정치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동초처럼 피어올라 민주화와 평화, 인권을 위해 헌신한 대통령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그의 마지막 당부는 국민의 가슴에 오래 남을 것이다. 동아시아가 배출한 세계적 경륜의 지식인으로서, 김 전 대통령의 가치는 미래에 더욱 빛날 것이다.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숭고한 뜻이 국민화합과 남북평화로 승화되길 바란다.


우리 국민은 올 한해에만, 두 분의 대통령과 종교계의 큰 어른이신 김수환 추기경님마저도 떠나 보내게 되었다. 참으로 착잡하고 비통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너무 힘든 일생(一生)을 살아오셨습니다. 한시도 편히 쉬시지 못한 긴긴 인고의 생활이셨습니다. 민중의 아픔과 함께 한 인생이셨습니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필 수 있도록 탁월한 지도력을 펼치셨습니다. 타계하시는 순간까지도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셨고, 민생의 어려움을 염려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평화통일의 역진을 경고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의 퇴보를 막고 고통의 민생을 해결하고 평화통일의 역진을 극복하는 일은 후진들에게 맡기시고 평안히 잠드십시오. 고통과 번민이 있었던 이 땅에서의 생(生)을 청산하시고 희망과 기쁨으로 저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시어, 아낌없는 존경! 과 큰 슬픔으로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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