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사상 유례없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국회가 완전 마비됐다. 지난 1일 열렸어야 할 6월 임시국회는 이번주에도 올스톱되고 ‘장기화 조짐’마저 보인다. 여야 모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문정국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야 간 첨예한 대립 속에 심한 내홍을 겪고 있어 ‘6월 거리 정치’를 국회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이대로 가면 국회는 장기간 식물국회로 전락해 민생법안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경제위기로 백척간두에 선 우리 미래는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다. 격한 정쟁일지라도 장외가 아닌 국회 안에서 해야 한다. 극한 보혁 갈등으로 대혼돈에 빠진 우리사회를 올바르게 이끌려면 국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 총체적 혼란에 빠진 국가를 봉합하기 위한 용단이 필요한 때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국과 사회가 요동치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 입장에서 취임이후 지금까지 지내온 상황을 생각해보면 역으로 ‘참 억울한(?) 측면도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먼저 지난해 이맘때쯤의 쇠고기 파동을 돌아보자.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면서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성장의 고속도로에 올려놓고자 했지만 쇠고기 파동을 겪으면서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쇠고기 문제를 미국에 양보했을까. 한편에서 생각하면 당시 이 대통령의 양보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경제적으로 유리한 선택일 수 있다. 미국 사람들도 먹고 있는 쇠고기 수입문제를 양보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얻어낸다면 그것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남는장사’라는 생각 아니었을까. 그러나 민심은 그렇지 않았다. 장사에서 이문을 남기는 유리한 선택이 민심을 얻는 데는 철저히 실패했다.

이후 전개된 상황도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지난해 촛불이 잦아들고 뭔가 해보려니 바로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시작으로 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그래도 우리는 위기를 슬기롭게 잘 대처해 나가고 있다. 금융위기를 예견하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고환율(원화가치 약세)이 우리의 수출 주력 기업들을 살렸고 국제유가 등 원자재가격의 급락과 금리인하 등 적절한 유동성 공급, 신속한 재정확대 정책도 우리 경제를 버텨줬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이 유행가처럼 ‘한국 위기설’을 퍼뜨렸지만 우리는 이를 ‘철 지난 유행가’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현재의 금융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할 나라로 한국을 지목한 것 아니겠는가. 결과론적! 으로 볼 때 이 모든 것들이 다 최종적으로는 이 대통령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거정국으로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성과는 한 순간에 묻히고 말았다. 위기극복이라는 경제적 성과 대신 빈부격차 확대가, 그의 지도력 대신 ‘일방주의’가, 돌파력 대신 화합과 포용력 부족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내고 한국 경제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명제아래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중산층 이하의 불만이 서거정국을 계기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종교적으로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던 불교계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래 가족이든, 국가든 정말 어려울 때는 싸우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나눌 떡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그 때부터 싸운다. ‘환란의 아픈 기억’을 품고 있는 우리 국민들 역시 그동안은 다시는 그 같은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참고 견뎠지만 경기가 호전된다고 하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동안은 위기극복에 한방향으로 매진했다면 이제는 위기극복에 집중하면서도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얘기다.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추모를 위해 3~4시간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에 담긴 민의를 읽어내야 한다. 고인에 대한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울분과 삶의 위기감이 투영됐다는 것을…. 장기화하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국민들의 불안과 피로도가 깊어진 탓에 고인을 향한 추모는 추모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비록 그의 재임 기간 보여준 능력과 리더십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존중 받았다는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촛불만 보면 폭도나 시위를 연상하면서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입을 막고 보자는 현 정부와 비교된 탓이기도 하다. 여권은 이번 조문행렬을 통해 국민들의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읽어내야 한다.

야권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4년 대통령 탄핵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었으나 탄핵 정국의 반사이익 효과는 얼마 가지 못했다. 민주당이 자신의 성찰 없이 국민이 바라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조문 정국이 가져올 반짝 효과에만 기대려 한다면 2004년의 과오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정치권이 민의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정치적 무기력증에 시달릴 것이며 더 나아가 정치 혐오증에 빠질 우려가 크다. 문제는 정치적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 세계를 뒤덮은 경제 한파를 벗어나기 위해 하나가 돼야 할 시점에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동력이 자칫 얼어붙어 버린다면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 선진국을 향해 나아가는 ‘대한민국호’가 헤어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 없이 보내는 국민들의 경고를 정치권은 엄숙히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국민은 감성이 풍부한 민족이다. 이런 면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역으로 우리는 쉽게 한 마음이 될 수 있고 열정적이기에 환란도 견뎌냈고 이번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감성적인 민족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알아줌’, 즉 ‘소통’이다. 잇따르고 있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 역시 핵심은 ‘소통의 부재’인 것이다.

예컨대 MB정부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에는 안이하고 무감각한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극히 일부의 의견이니 경청할 가치가 없다는 투다. 여권의 국정쇄신과 야권의 대국민사과 및 검찰개혁 요구에도 냉담한 반응이다.

최고 지성인 우국충정 평가절하해선 안된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청와대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서울대학교 교수가 모두 몇명인 줄 아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체교수 수가 1700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지난 3일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 124명은 전체 교수의 극히 일부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겠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한 500만 인파의 의미도 ‘국민의 10분의 1’로 축소되지 않을까 싶다. 한 나라 최고 지성인들의 우국충정을 그렇게 평가절하한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아첨을 좋아하던 제나라 위왕(威王)은 정승 추기(皺忌)의 간언으로 자신의 잘못을 간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왕의 실정을 간하려는 사람들로 왕궁 문앞이 장바닥처럼 붐볐다. 문전성시(門前成市)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시정의 소리에 귀를 막는 제왕에게 내일은 보장될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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