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으로 한 고비를 넘은 듯 보이던 박 연차 리스트의 불똥이 이제 여권으로 번져가는 추세다. MB측근으로 알려진 천신일 세종 나모그룹 회장의 소환이 임박해 보인다. 이미 천 씨의 사무실이 압수 수색을 당하기까지 한 터라 털면 먼지가 안 나겠느냐는 게 세간의 상식이다.

박 연차 리스트 수사는 천 회장에만 머물지 않을 듯싶기도 하다. 천 씨의 여권 내 보폭으로 봤을 때 또 어떤 실세에까지 고리가 채워질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 나 떨고 있니?’ 하는 루머가 나도는 이유가 실감난다. 전 정권, 현 정권, 여당, 야당, 영남권 관료사회 등등을 대상으로 전 방위적인 로비를 펼쳤음이 검찰 수사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 내부의 고위직까지 수사 대상이 되고 있다 하니 할 말이 없다.

당연히 혐의를 지닌 이들을 지탄하고 비난하는 언급들이 각종 미디어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호통이 유난히 크고 우렁차다. 국민을 대신해 할 말을 해주고 있으니 시원스럽고 통렬한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지난 정권 때의 비리에 비하면 그나마 액수가 적지 않느냐는 정상 참작의 시각도 존재하긴 하지만 사법이 규정하는 죄 값과 부도덕에 대한 국민적 징벌은 별개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마치 부피와 무게를 동일한 계량 단위로 쳐줄 수 없는 것처럼 액면의 크기로 비리의 경중이 재단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왠지 그 호통과 꾸지람이 공허해 보이는 까닭은 뭘까?

당연한 비난에 왜 피가 거꾸로 솟지 않고 오히려 냉소가 입가에 머무는 이유는 뭘까?

혐의를 지니 이와 혐의를 지니지 않은 이의 사이에 존재해야 할 엄연한 쇠창살이 쉽게 의식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또 뭘까?

필자는 리스트 정국에 비친 더욱 심각한 폐해는 사실상 이 같은 우리들의 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본다. 돈에 관련된 정가의 비리에 국민들은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다. 어떤 비리가 터져 나온 들 국민들은 ‘그 놈 참 못됐구나’ 하는 것 보다는 ‘재수없이 걸렸구나’는 식으로 받아들일 정도다.

‘정치=돈’의 등식에 세뇌됐다고 봐야 할는지도 모른다. 참된 선량이 되겠다고 정치를 꿈꾸는 신인들도 곧잘 이 장벽 앞에 좌절하고 만다. 이러이러한 아름다운 정치를 하겠다는 포부를 다 풀어놓기도 전에 ‘돈이 있어야 할텐데…’ 하는 말이 되돌아온다. 정치를 하겠다고 누군가가 나섰다는 얘기라도 들을라치면 ‘돈 좀 모은 모양인데’ 하는 식의 선입견이 먼저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닌다.

결국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에서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이런 말들이 상식인 양 나도는 세태이기에 정가의 비리를 꾸짖는 호통들이 공허해지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 써야 할 정도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고 정직한 지적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금권정치를 조장하고 있느냐고 항의한 들 별 대수가 없다. 세상이 그러니까.

박 연차 리스트 수사에 나선 검찰은 갈 데까지 가야 한다. 그 안에 그 어떤 두려운 것이 들어있든 솥뚜껑은 열어봐야 한다. 국민들이 리스트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그러나 실체의 규명만으로 한국 정치의 속성이 바뀔 리는 없다. 국민들의 의식을 비롯해서, 그 속성 자체를 통째로 바꿔낼 수 있는 통렬한 성찰이 없이는 리스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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