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이 가셨다.

그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느라 명동 성당 앞엔 몇날 며칠 장사진이 쳐졌다. 냉랭한 겨울 거리에서 몇 시간씩 조문 차례를 기다려야 했지만 사람들의 줄은 끝없이 이어졌다.

조문객은 방방곡곡에서 몰려들었다. 이들 인파 때문에 장사를 망치면서도 명동 앞 상가 주인들은 화장실을 내주고 커피를 나누었다.

운구가 되던 날도 수많은 낯선 이들이 거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이가 묻힌 묘소는 지금도 추모와 헌화가 그치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의 정신을 닮겠다는 갸륵한 뜻들이 릴레이를 펼치듯 줄을 잇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장기 서약이 잇따르고 사랑의 풀씨가 온 누리에 퍼지고 있다.

그 어느 죽음이 이처럼 장엄하고 일체의 감동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무결점의 위인은 세상에 없겠지만 모든 이들이 추기경의 선종을 한 점 가식 없이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를 넘어서, 가치관의 차이를 넘어서, 당파를 넘어서, 지난 시대의 악연을 넘어서, 관계의 거리를 넘어서 당대의 한국인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배웅하고 있지 않는가.

추기경의 선종을 추모하는 이 순백의 발길들을 보며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얹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마지막 길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선한 히브리인들을 떠올렸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상상일까.

추기경은 그렇게 한국인들의 곁을 떠났다. 그가 하늘에 오르고 나서야 우리는 그이가 짊어졌던 시대의 십자가가 너무도 무거웠음을 실감한다.

온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눈처럼 순결했음을 깨닫는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한국의 양심세력은 시대의 고통이 사무칠 때마다 그의 입을 주시했으며 그의 구원의 손길에 삶을 의지해야 했다. 더러는 핍박의 주역들조차 그 분 앞에선 시퍼런 칼날을 등 뒤로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폭력의 가해자들을 증오하지 않고 온몸으로 막아섰을 뿐이며, 그저 낮은 자리에서 억압받는 인간의 고통에 마음 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겨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추기경의 이뤄 온 사랑의 덕업조차 소유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유리관 속에 눈을 감고 누운 추기경을 보며 자신과의 관계를 회상했다. 그 관계의 고리를 들춰내느라 언론은 비지땀을 흘렸다. 그 양반과 나는…이라는 어투로 관계의 추억을 떠올리다 여론의 소박을 맞은 전직 대통령도 있었다. 속세의 이치대로라면 탓할 까닭도 없겠지만 그들 관계의 회상마저 그 분 앞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악연으로 기억되는 이들의 조문마저 가증스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추기경이 껴안았던 것은 정작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등 뒤에 얹혀 진 크고 작은 고난의 십자가들을 보듬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의 심장은 십자가의 진리를 잊지 않는 맹세이다. 예수 고난의 십자가를 영원히 기억하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선한 의지로 하늘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계시이다.

티끌 없는 마음으로 가만히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라. 아내의 등 뒤를, 자녀의 등 뒤를, 이웃의 등 뒤를, 동료의 등 뒤를, 미운 자들의 등 뒤를.

그러면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한 결 같이 무거운 십자가 하나씩을 짊어지고 힘겹게 터벅터벅 인생을 걷고 있음을. 그들의 십자가를 잊지 말라고 추기경의 죽음은 유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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