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광주고법 법정에서 국민의 눈길이 쏠린 재판이 열렸다. 이른바 ‘오송회 간첩 조작사건’.

1982년 군사정부 시절 전북 군산 제일고 교사 5명을 비롯한 관계자 9명이 4ㆍ19와 5· 18희생자 추모제를 치른 것을 공안당국이 간첩사건으로 조작, 억울한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사건 개요야 이렇듯 간단해 보이지만 지난 25년여 동안 이들이 겪어야 했던 통한의 세월은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게 당연하다.

자신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게 중에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중병을 앓다 이미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한차례의 추모제에 참석한 대가가 26년이 지난 법정에까지 이어졌으니 그 인고의 시간 속에 담긴 인생의 비애를 감히 그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한 많은 세월 탓이었든지, 이날 법정에 모인 9인의 오송회 관계자와 가족들은 판사의 선고가 내려지기 전부터 이미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었다.

결과는 무죄.

26년여 세월 동안 피고인들의 삶을 옭아맸던 굴레가 드디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장내에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려 조용히 입을 연 광주고법 형사1부 이 한주 부장판사의 선고 사유는 선고의 순간 보다 더 감명깊게 또 한번 방청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재판장은 경찰의 불법연행과 감금, 수사관들의 구타와 고문이 허위자백을 낳았음을 조목조목 증거하면서 지난 군사정부 시절 법원의 잘못된 평결을 머리 숙여 사죄했다.

재판장은 또한 오송회 사건의 비극성이 반공 이데오로기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극우 군사정권의 테러였음을 암시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법대에 선 재판관이 신념으로 삼아야 할 정의를 다짐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할 것이며…어떠한 정치권력이나 이익단체로 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책무에 충실할 것입니다.”

필자는 이 재판의 전 과정을 통신뉴스를 통해 지켜보면서 턱없이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그들 피해자들과 당대의 아픔을 함께 겪은 사람으로서의 잊지 못할 회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같은 양심이 있어 그 피어린 시간 속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꾸준히 성장을 계속해 왔고, 또 그 같은 양심이 있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긍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기의 시대가 만든 비극적 사례들이 어디 오송회 사건 뿐이겠는가.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 역사의 왜곡된 수레바퀴에 깔려 질식해야 했던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는 ‘극우 반공 이데오로기’라는 권력의 광기가 도사려있었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광기는 이제 완전한 소멸에 이르러 역사의 무덤에 묻혔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만은 없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아직 눈에 밟히고 있기에 필자의 수심 또한 깊어진다. 빨갱이라는 어휘가 까닭없이 난무하는 인터넷 공간 속에서, 교과서를 고치라고 호령하는 우익단체들의 주창 속에서, 북한으로 날려지는 풍선 속에서…유령 처럼 얼핏 얼핏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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