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탤런트 최진실씨의 죽음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죽은 자는 이미 한줌 재가 되어 말이 없지만 세태 인심은 아직도 그이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외국의 유력 언론에서 그의 죽음에 관련된 장황한 해설 기사를 내 보낼 정도로 그녀의 존재감이 그만큼 컸던 까닭일 것이다.

고 최 진실을 저세상에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미안하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말로 축약되고 있다.

평소 TV를 가까이 하지 않는 필자는 솔직히 그녀의 대중적 카리스마에 별로 관심을 두지 못했지만, 유명을 달리 하고 나서야 새삼 그녀가 국민배우였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늘 가까이 있던 주변의 누군가와 영원한 별리라도 한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 당혹감뿐만 아니라 최 진실 씨의 죽음은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 악풀에 대한 경각심과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시각이 그 파장의 중심에 근거한다.

마치 비극의 서곡처럼 한차례 요동을 친 안재환의 자살사건이 감당못할 사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고, 또 그 사채와 최 진실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루머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결과론이 지배적이기에 그 같은 분석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인터넷 악풀을 보는 위기론은 한 두 차례 거론됐던 사안이 아니기에 필자는 여기에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싶다.

연예인은 물론 한국 사람들의 경우 타인의 사생활에 지나칠 정도로 지독한 관심을 가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몇 사람만 보이면 화제의 중심은 늘 그곳에 부재한 누군가에 대한 얘깃거리 일 때가 많다.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결국 그곳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담을 넘고 넘어 진실로 고착되면서 화제의 주인공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뜻밖의 캐릭터의 인물로 고착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캐릭터는 본인 부재의 상태에서 재단된 일종의 허구이기에 폐해를 낳는다.

악의적 허구라면 사회적으로 치명적 피해를 안길 것이며, 선의의 허구라면 본인에게 견디기 힘든 심적 부담감을 안기는 것은 물론 가공의 아우라를 만들어 가치판단을 흐리게 한다. 또한 타인의 도덕률을 따져 묻는 시선도 유달리 표독스럽기에 ‘사생활 엿보기’의 증후군은 심각한 인권 훼손사태를 빚을 때가 많다.

외국의 유명인들에게서 보통으로 빚어지곤 하는 스캔들이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파장을 만드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예컨대 일국의 대통령이 관계된 ‘클린턴-르윈스키 부적절 행위 스캔들’ 같은 것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떠한 결과를 남겼겠는가.

이렇듯 근원적 증상은 진단되지만, 개선책 찾기는 요원하다. 사람의 됨됨이와 관계를 유달리 따지는, 일정 부분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또 달리 보면 이 같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공동체에 긍정적 기여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게 사실이다.

당하는 입장에서 안타깝고 당혹스러울 일이긴 하지만 결국 인기 연예인들은 이 같은 대중의 속성을 숙명적으로 극복해가야 할 존재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환호는 그들에게 돈을 만들어주지만, 때로는 부메랑이 되어 치명적인 독을 안겨주기도 한다.

돈은 좋지만 독은 싫다는 이분법적 욕망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에 있어서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명제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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