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탤런트 안 재환의 죽음으로 자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새삼 환기되고 있다.

그러잖아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심각한 수위에 이른 게 사실이다.

1997년 IMF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자살률은 이미 OECD 국가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해 만 해도 우리나라 자살건수는 10만명 당 24명, 하루 평균 무려 3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에 비해 동반자살이 많아 그 상처가 심각하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젊은 주부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죽음의 길을 동행하는 사건이 적잖게 발생하고 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이 비극적인 처지에 빠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동반자살에 이른다는 분석이 제기되곤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오랜 유교사회에서 비롯된 책임의식의 과잉이 그같은 비극을 낳는다고 추측되기도 한다.

또 성적경쟁이나 집단 이지메에 내몰린 청소년들의 도발적인 자살 건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는 것도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죽은 이들은 더 이상 입이 없기에 자살에 대한 모든 분석들은 사실 추론에 불과하다.

단지 한 가지 명쾌한 것은 까닭 없는 자살은 없고, 모든 자살은 사전에 ‘원인 사인’ 이라는 징후를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치부되는 자살 또한 주변인들이 관심만 갖는다면 불행한 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사회의 자살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너무 미미하다.

그저 단순한 개인적인 비극 혹은 심약한 이들의 행태쯤으로 여기기가 십상이다.

‘죽고 싶다’라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는 까닭인지 대다수의 사람들 또한 그런 얘길 건성으로 스쳐 보낸다. ‘죽을 용기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야지’ 로 대변되는 자살에 대한 냉소 의식이 뿌리 깊기도 하다.

이렇듯 자살을 보는 가벼운 의식 탓인지 한국사회에서 자살의 징후가 확인되기는 쉽지 않다. ‘죽고 싶다’ 는 말이 실천에 옮겨지기 까지 주변인들은 물론 배우자 혹은 가족들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자살에 대한 충동과 주변의 무관심이 합쳐졌을 때 결국 자살이라는 실체에 이른다고 심리학자들은 지적하기도 한다.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대계 미국작가 엘리 위젤은 나치 수용소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을 ‘흑야, The Night’ 라는 논픽션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했다. 위젤은 이 작품 속에서 “목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목숨은 우리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고 절규하며 “증오보다 더 심각한 고통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무 관심” 이라고 호소한다.

불행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없다.

세상 곳곳에 펼쳐진 이 불행이라는 이름의 지뢰밭을 걸어가는 인간의 삶 또한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게 당연하다.

경쟁력이라는 이름의 생산성이 최고의 가치로 대변되는 현대사회는 지뢰밭을 밟은 약자의 상처에 둔감하다.

불행에 대한 이심전심의 정서가 갈수록 희박해져만 가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자살률 급증에 따라 이제 자살을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자살에 대한 예방의식을 함께 공감하자는 주장이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엘리 위젤의 언급에서처럼 타인에 대한 ‘관심의 문화’를 우리사회에 정착시키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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